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쩌다 윤작가 Jan 06. 2022

35_다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

위기의 순간들

우리 모녀는 큰 이질감이나 어려움 없이 무난히 새로운 생활을 즐기며 적응했다. 환율이 높았던 시절이고 생각보다 생활비가 많이 들어 돈 걱정은 좀 되었지만.. 밴쿠버에서 지낸 2년이 대체로 행복했지만 어려움이나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 뜻밖의 난관 봉착_급식 배신 

앞의 글(에피소드 #4)에서 쓴 적이 있다. 내가 이 학교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급식’이었다고.. 하지만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살면서 토종 입맛이 되어버린 우리 딸은 나를 배신했다. ㅎㅎ 그때 당시 한 달에 55달러의 급식비(한국돈으로 6만 원이 넘었다)를 지불했건만.. 허걱! 못 먹겠단다. 


결국 첫 달 급식비는 날리고 그때부터 1년간 (딸이 서양 음식에 적응하기까지..) 난 도시락의 지옥에 빠졌다. 못 먹겠다는데 별 수 있나. 한국에서 바쁜 워킹맘으로 살며 음식도 별로 안 해 먹고, 게다가 바로 옆 친정의 도움으로 살았던 내가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캐나다 입성 초기엔 피자도 햄버거도 별로 안 좋아하던 아이다. 지금은 없어 못 먹는다. ㅎㅎㅎ


문제는 나의 요리 실력과 그곳이 캐나다라는 점이었다. 우리나라 도시락처럼 싸줄 수는 없는 일. 또, 다른 아이들을 생각해서 냄새가 나는 음식을 싸줄 수도 없는 일. 그때가 시작이다. 내가 김밥 장인의 길에 들어선 것은.. ㅎㅎ 김밥, 유부초밥, 멸치주먹밥을 번갈아 싸주었고 어떤 때는 호떡이나 만두를 싸주기도 했다. 나중에 중국인 아이 도시락 얘기를 듣고는 계란볶음밥을 해주기도 하고.. 내 음식 솜씨는 캐나다에서 폭풍 성장을 했고, 아이는 서양 음식에 서서히 길들여져 1년 뒤부터는 정말 싫은 메뉴가 있는 날만 도시락을 싸주게 되었다는 해피엔딩 스토리..




2. 동서를 막론하고 집주인은 갑인가 봉가 

우리가 살았던 콘도의 집주인은 이름으로 보아 이태리 이민자로 추측되는 부부였는데, 주로 전화나 이메일로 의사소통을 하고 가끔 얼굴을 보는 일도 있곤 했다. 월세를 한 번도 밀리거나 못 준 적도 없고, 집도 사실 세간도 별로 없고 모녀 둘이 쓰니 별로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다. 


1년 단위로 계약을 하기에 1년이 되어갈 무렵 월세가 더 저렴한 아파트로 옮길까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귀차니즘이 발동하여 편리하니 그냥 있자 하여 그 집에서 2년을 살았다. 재계약을 할 때 월세를 올리지 않는 것에 대해 집주인은 약간 생색을 내었고 난 고맙다 인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3박 4일 여행을 갔을 때였다. 무슨 일로 집주인이 나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여행 중이라 메일을 확인하지 못하고 돌아와서 집주인의 전화를 받았다. 다짜고짜 왜 연락이 안 됐냐는 거다(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으면 됐을 텐데 말이다). 여행 갔었다 하니 앞으로는 여행을 가면 자기네한테 미리 말을 하라는 거다. ㅎㅎㅎ 아니 여기가 무슨 회산가.. 알았다고는 했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이라이트는 귀국으로 집을 뺄 때였다. 그즈음 딸아이가 거실 벽장문에 부딪혀 아래 부속이 뭔가 빠져버린 일이 있었다. 문이 닫히긴 해도 약간 고정이 안 되는 거였다. 집주인에게 말해 핸디맨이 왔는데, 그 문이 너무 오래돼서(30년 된 아파트..) 그 부속을 지금은 구할 수 없다는 거다. 우리의 잘못도 있긴 하지만 집이 오래된 탓도 있건만, 그것 때문에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단다. 보증금은 월세의 절반이었으니 그때 환율로 약 70만 원 돈이었다. 문 아래 부속 하나 값 치고는 너무나 비싼… (그 부속 때문에 문짝을 교체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는 1년 11개월을 살았지만 1년을 더 연장 계약했기에 마지막 달 월세도 지불했건만.. 따져보았지만 소용없고.. 그것도 우리가 good tenant(좋은 세입자)였기에 봐주는 거란다. ㅎㅎ 그 사람 입장에선 정말 그랬을 수 있지만 난 열이 받았다. 


우리가 깨끗이 산다고 살았어도 2년을 산 집이니 어쩔 수 없이 벽의 페인트도 새 것 같지는 않을 터.. 하지만 조금의 얼룩도 남아있지 않게 원래의 모습으로 해달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날부터 난 온 벽을 지우개로 손수 깨끗이 다 지웠고 집주인은 만족해했다. 


이건 어쩌면 캐나다 집주인이라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한국식 사고로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캐나다 학교 선생님들한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일 수 있다. 학교에서도 한국 담임선생님처럼 생각하여 가끔 섭섭함을 느낀 적이 있는데, 아 캐나다 학교는 이렇구나 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었다. 내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원래 그래’ 그랬을지도.. 




3. 멀리 사는 것 자체로 불효자가 된다

앞에서(에피소드 #06) 쓴 적이 있듯이 친정엄마‧아빠와 매일 같이 화상채팅을 하였다. 부모님은 한국 시간으로 매일 아침 9시, 우리는 캐나다 시간으로 오후 4시 또는 5시(서머타임제 때문에 시간이 바뀌기도 했다)에 만났다. 


우리가 로키 여행을 다녀왔을 때 한동안 채팅을 못하여 전화를 하니 아버지 말씀이 엄마가 갑자기 여행을 갔다고 하시는 거다. 그런가 보다 하고 며칠이 지났는데, 엄마가 더 있다 오신다고 하셨다기에 평소 같지 않네 하고 말았다. 곧 친정아버지 생신인데 하면서 의아해하다가 결국 친정아버지 생신날이 되었고, 식구들이 다들 모였다면서 오랜만에 화상 만남. 엄마, 아빠, 이모, 올케언니, 조카 등 다 모여있는데, 엄마가 구석자리에서 얼굴이 잘 안 보이게 앉아 계신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


“엄마, 가까이 좀 와봐”

“엄마, 얼굴이 왜 그래?”


내 눈치로 식구들이 그동안의 일을 쏟아 낸다. 

“아이고, 니 엄마 죽다 살았다” 친정아버지의 말에 가슴이 덜컥..

“아휴 아버님, 아가씨 걱정하게...” 올케 언니의 말..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엄마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는데) 갑자기 정신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쓰러져 많이 다치셨고 특히 얼굴과 입 안이 난리가 나서 수술을 받고 며칠 병원에 계셨다는 거다. 내가 알면 멀리서 걱정하고 속상해할까 봐 온 가족이 감쪽같이 나를 속였던 것.. ㅠ.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나는 가슴 아픈 사건이다. 우리가 뒤늦게 알고 울음을 터뜨리니 이젠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하시는데.. 자식이 멀리 있다는 것 자체로 불효구나 싶은 생각에 어찌나 죄송하던지.. ㅠ.ㅠ 




4. 학교 생활에도 위기가.. 

딸아이는 대체로 학교 생활을 잘했는데, 두어 번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운동장에서 우리 아이와 친구가 다른 반 어린 동생에게 나쁜 말을 했다고 그 반 보조교사가 직접 딸아이 반으로 찾아와 사과를 하라고 하며 모든 아이들 앞에서 창피를 줬다는 거다. 딸에게 물어보니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단다. 아이는 너무나 억울해했으며, 내가 믿기로 딸아이는 거짓말하는 아이도 아니고, 워낙 동생들을 예뻐라 하는 아이기에 의아했다. (우리 딸은 어려서부터 동생들이나 아기를 너무나 예뻐하고 잘 놀아주어 동생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아이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알고자 학교에 찾아가 그 선생을 만났다. 


“우리 아이가 나쁜 말 하는 것을 직접 보셨나요?”

“본 건 아니지만 (자기네 반) 아이가 그렇게 들었다고 말했다”라고 한다. 

“그 아이 말만 듣고 그러셨나요? 우리 아이는 그런 말 안 했다고 하는데요”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니 딸이 무례했다” 한다. 

“무례한 건 당신이다. 직접 보지도 않았으면서 왜 우리 아이 말은 믿지 않느냐” 하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이 여자가 나한테 무례하다고 했다”면서 갑자기 울고 불고 난리.. 


얼떨결에 난 학교에서 선생 울린 학부형이 되었고, 교장선생님과 면담까지 하게 되었다는.. ㅠ.ㅠ

우리 학교의 다른 한국 학부형들 이미지까지 나쁘게 만들었나 싶어 걱정이 되었으나, 잘했다고 응원해주기도 한다. 인종차별적인 요소가 있다면서.. 


아이 담임선생님께 서운했던 게 이 시점이었는데, 그 다른 반 보조교사가 딸아이네 반에 와서 사과하라고 아이한테 다그칠 때 담임선생님이 옆에 계셨는데도 아무 말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우리 반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하면서 자초지종을 물을 것 같은데 말이다. 교장선생님께 그 말을 하니, 담임선생님은 그 장면을 본 게 아니니 끼어들 수 없다는 거다. 난 이해가 안 되지만 어쨌든 그게 캐나다식인지 그 담임선생님 방식인지는 모르겠다. 


또 한 번은 친하게 지내던 같은 반 어떤 중국 여자아이 때문에 맘고생을 꽤 한 적이 있었다. 그 아이 때문에 하도 속상해해서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는데, 선생님 말씀이, “She lies.” 하신다. 그 친구가 거짓말하는 아이라는.. 그러면서 되도록 다른 아이와 어울리게 하란다.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게 이해되는 상황. 알고 보니 그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의 질투심 같은 것에서 비롯된 이간질을 했던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가정환경의 변화로 그 아이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진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고, 그 아이의 엄마와 나 사이의 싸움으로까지 번졌는데, 그 엄마의 전화와 문자 폭격이 힘들었다. 그 엄마는 무조건 니 딸이 잘못했고 니 딸이 문제라며 온갖 욕을 하고 흉을 보는 거였다. 담임선생님한테 들은 말 ‘당신 딸이 거짓말한다더라’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 말하고 담임선생님을 만나보라며 그냥 무시했지만 그럼에도 스트레스가 너무나 컸다. 


그때가 1년 반 정도 된 시기였는데, 그냥 남은 6개월만이라도 전학을 시킬까, 아니면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딸아이는 그 학교가 좋다고 죽어도 전학을 안 가겠다고 하여 그냥 그 학교에서 6개월을 더 보냈고, 그 아이와는 어쩔 수 없이 멀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건은 유야무야 되었고, 다행히도 친한 다른 아이들이 있었기에 행복하게 유학생활을 마무리했다. 


나도 불완전한 인간이고 모든 게 처음이다 보니 내가 오해하고 잘못한 일들일 수도 있다. 지금은 그런 사건들조차 추억의 일부가 되었고, 다음에 또 다른 인간관계에서는 이런 시행착오나 잘못을 하지 말아야지 하고 조심하게 해주는 경험이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