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다가 개똥을 밟거나
고1 때 미술시간이 있던 날이었다. 손잡이가 달린 4절 스케치북을 들고 학교 건물을 향해 걸어가는데 새가 우는 소리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반사적으로 스케치북을 머리 위로 쳐들었는데! 스케치북에 반, 내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에 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두들 알겠지) 일찍 등교한 덕분에 본 사람이 별로 없어서 덜 창피한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수돗가에 가서 아주 그냥 머리를 감다시피 하고, 스케치북 표지는 닦다가 우글쭈글해져서 그 부분만 뜯어서 버려버렸다.
엄마, 그 언니들은 왜 나한테 나쁜 말 했어?
저녁을 차리는데 아이가 갑자기 울면서 학교를 안 가겠다고 했다. 안아주며 왜 그러냐 물으니 무섭다고만 하고 이유를 말하기 싫어했다. 계속 달래며 선생님이 무섭니, 친구들이 무섭니 물었더니 모르는 언니들이 무섭다고 했다. 리세스 시간에 자기한테 와서 나쁜 말을 했다고. 친구 A랑 놀고 있었는데 자꾸 따라오며 그랬다고. 무슨 나쁜 말을 했냐고 물으니 계속 말하기 싫다고 하다가 한 번만 말하겠다면서 귓속말로 'mean이라고 했어. you're mean'이란 말을 들었다고 했다.
A의 엄마에게 상황을 말하고 A에게 혹시 오늘 리세스 시간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A는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A의 표현에 따르면, 언니들이 와서 A를 weird하게 쳐다봤고 nice하지 않았으며, 꼬꼬에게 idiot라고 말했고, 같은 반 친구 J에게도 nice하지 않았다고 한다. 꼬꼬는 idiot이란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해서 그런 단어로 듣지 않고 본인이 이해하는 한도의 부정적 단어를 떠올린 것 같다. 그 시간엔 킨더와 3학년이 놀이터를 같이 쓰는데 A의 오빠가 반은 다르지만 같은 학년이라 그 두 명을 보게 되면 동생들 괴롭히지 말라고 얘기하겠다고 했단다.
담임 선생님께는 아이가 무서워서 학교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상황임을 알렸다. 등교하더라도 리세스 시간은 교실에서 보내고 싶어 하는데 아이가 안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냐고 적어서 이메일을 보냈다. 아이에게도 선생님께 말했으니 네가 원하지 않으면 리세스 시간엔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그제야 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게임도 하고 책도 읽고 웃고 떠들다가 자려고 누우니 또 생각이 나는지 아이가 무섭다며 훌쩍거렸다. 그 언니들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했냐고. 그래서 아이에게 다시 얘기해 줬다.
기분이 엄청 나쁘지? 근데 왜 그랬을까 이해하려고 하지 마.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그냥 놀다가 새똥을 맞은 거야. 너무 황당하지. 근데 새한테 왜 똥 싸냐고 물어본들 새가 알겠니? (몰라) 걔는 그냥 새니까 날아가다 똥을 싼 거야. 엄마는 진짜 새똥 맞은 적 있어. (진짜?) 응, 까맣게 잊었는데 너한테 얘기하다 보니 겨우 생각나네. 그리고 우리 길에서 개똥 밟은 적 있잖아. 기분이 어땠어? (너무 싫었어) 근데 우리 어떻게 했어? 신발을 풀에 막 문지르니까 똥이 거의 다 없어져버렸지? 나중에 물에 조금 씻으니까 다 사라졌잖아. (맞아) 그러니까 우리 오늘 일이 생각나서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면 즐거운 상상을 하자. 수요일에 보는 영화는 얼마나 재밌을까? 다음에 디즈니랜드 가면 롤러코스터 다 탈 수 있겠지? 민속촌에서 말타기 하고 싶다...
다음 날 아침 담임선생님이 답장을 보냈다. Vice Principal에게 전달했고, 아이가 등교하면 그와 면담할 것이고, 그 두 명을 아이가 구별해 낼 수 있는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즉시 리세스 선생님에게 상황을 알리도록 아이를 교육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리세스 시간에 안 나가도 되는지에 대해선 답을 얻지 못해서 아이에게 선생님들이 너를 도우려고 몇 가지 물어볼 거란 말만 전했다. 아이는 그럼 리세스 나가야 하냐며 무섭다고 또 울었다. 누가 또 와서 괴롭히면 선생님한테 달려가서 말하라고 했더니 언니들이 자꾸 따라오는데 어떡하냐며 울었다. 따라오면 더더욱 선생님한테 달려가야 한다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보호하고 도와주려고 있는 거라고 강하게 말해주었다.
하교할 때 담임선생님과 얘기해 보니 아이는 잘 지냈고 리세스 시간에도 나갔다고 한다. 꼬꼬와 A가 같이 면담을 했고, 상급생 두 명은 식별했다고 한다. 그 이후에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는 우리가 알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더 묻지는 않았다. 아이에게 살짝 물으니 A랑 같이 가서 무섭지 않았고 웃긴 선생님이 있었다고 한다. 상급생 두 명한테 사과받게 하겠다고 하셨다는데 아직까진 그런 일은 없는 눈치다. 굳이 아이에게 그 일을 끄집어내어 묻지 않았다. 아이 말로는 리세스 시간에 그 상급생 두 명이 자기 앞을 지나갔는데 괜찮았다 하고, A는 그 둘을 보고 무섭다며 숨었다고 한다. A가 무서워해서 자기가 꼭 같이 다닐 거라고 했다. 담임선생님께는 아이에게 동일한 일이 발생 시 주변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다시 한번 주지 시켰고, 아이가 다시 학교를 안전하다고 믿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좋은 사람만 있는 아이의 세상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입력값이 하나 들어갔다. 첫 번째 입력값이 크지 않고 상황을 같이 견뎌줄 친구가 매개변수로 같이 들어가서 어쩌면 다행이다. 사람과 관계를 맺다 보면 별 일이 다 일어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대처할지, 아이가 출력값을 잘 낼 수 있으면 좋겠다.
한 달에 한 번 리세스 시간에 학부모가 참석할 수 있는 날이 마침 며칠 뒤에 있었다. 아이는 친구들과 잘 놀았고 특별히 접근하는 상급생은 없어 보였다. 아이와 A가 운동장 쪽으로 달려가 나뭇가지와 돌멩이들을 모아 뭔가를 만들고 있는데 3학년 여학생 두명이 다가가더니 뭘 만드냐고 물었다. 아이들이 페어리하우스라고 말하니 재밌겠다며 그 아이들도 이것저것 가져와서 같이 짓다가 종이 쳐서 우르르 학교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지난 경험 때문에 무서워하진 않을까 살짝 걱정했는데 그러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타인의 좋은 면을 먼저 보는 사람으로 계속 자라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