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있어 감사한 날들
한국에 돌아가게 된다면 어디에 살지 가끔 고민하곤 했다. 처음에 남편은 지방에 살기 좋은 도시 몇 곳을 찾아보며 그곳에서의 삶을 꿈꾸기도 했는데 작년 여름에 가보고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못 살겠다고 했다. 신도시형 인간임을 본인만 망각하는 것 같다. 우리는 경기 남부 지역이 익숙해서 그쪽의 몇 개 도시들을 살펴봤는데 시세가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는 돈이 별로 없어서 전세는 꿈도 못 꾸고 월세를 찾은 건데 한국도 집 빌리는 비용이 낮지 않다는 깨달음만 얻었다. 사실 살고 싶은 곳은 내 친구(이자 아이의 친구의 엄마)인 C가 사는 동네였는데, 전부터 그런 얘기를 비치긴 했지만 정말 괜찮을지 걱정이 됐다. 한국행이 결정되고 나선 C에게 직접 물으니 같은 아파트 같은 동이라도 괜찮다고 해줘서 참 고마웠다.
아이 학교를 중심으로 세 개의 아파트 단지가 있었는데 5월에 월세로 나온 집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 친구가 사는 집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단지에 빈 집이 있어 C에게 부탁해 집 상태를 확인했다. 아파트의 나이가 있어서 낡은 모습이 있었지만 구조를 확장하지 않고 붙박이장이 많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 살고 있는 집은 그 정도로 상태확인을 할 순 없을 것 같아 그냥 그 집으로 정하고 보증금과 월세 비율을 조정해서 가계약을 하고 계약금을 보냈다. 며칠 뒤 실제 계약일에는 친구가 부동산에 가서 나와 영상통화를 연결하고 집주인과 서로 신분확인을 한 뒤 계약서를 작성했다. 내가 집을 매매하는 게 아니라서 영사관의 공증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이와 먼저 한국에 들어와 부모님 댁에 며칠 머문 뒤 드디어 월요일, 입주날이 왔다. 친구도 위임계약 당사자라서 계약서를 들고 왔고, 임대인과 만나 잔금을 치렀다. 임대인이 한 달 전 계약서 쓸 땐 언급하지 않았던 요구사항이 있어서 좀 찜찜하긴 했으나 계약을 파기하기도 어려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하고 마무리했다. 몇 년 뒤 계약이 끝날 때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며, 사람을 믿어보기로 한다.
열쇠를 받고 행정복지센터로 가서 전입신고를 하려고 했더니 남편이 세대주라서 같이 오지 않으면 전입신고가 안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편의 신분증이나 위임장이 있어야 한다는데 그것도 없었고, 일단 온라인으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정부24 사이트에 들어가 남편의 공인인증서로 로그인해서 부모님 댁에 들어가 있던 우리 가족 셋을 새 주소로 옮기고 전입신고를 했다. 확정일자도 온라인으로 받을 수 있겠구나 싶어 찾아보니 대법원인터넷등기소가 있었다. 역시 한국! 상단 메뉴에서 [확정일자]를 눌러 입력하라는 내용들을 입력하고 임대차계약서를 카메라로 찍어 업로드한 뒤 비용을 결제했더니 완료 화면이 떴다. 한 시간 남짓 지나자 확정일자 부여 완료 문자와 전입 신고 완료 문자가 왔다.
집을 계약한 당일 오후 인터넷과 정수기 설치가 완료되었고 다음날 오전에 냉장고 및 세탁기, 에어컨 설치가 예정되어 있었다. 쿠팡으로 청소기 및 이불 등을 주문해 놓고 부모님 댁에 갔다가 다음날 아침에 아이와 모든 짐을 챙겨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택배를 뜯어 청소를 하고 있으니 냉장고와 세탁기가 도착했고 신나게 이불빨래를 했다. 친구가 차를 가져와 마트에 같이 가줘서 긴급히 필요한 살림살이는 구매할 수 있었다. 에어매트를 펴고 친구에게 빌린 요를 깔고 아이와 누워 있자니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생각이 났다. 그땐 이 옆에 누운 아이가 내 뱃속에 있었는데 이렇게 많이 커서 나를 꼭 안고 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 큰 위안이다.
한국의 여름은 어마무시하기 때문에 에어컨 설치가 시급했는데 기사님이 일정조율이 어려우셨는지 두 번이나 일정을 미뤄서 금요일이 되었다. 세 번째 미루겠다고 연락이 왔을 땐 또 미루면 주말을 넘어갈 것 같아 도저히 안 되겠어서 거절했더니 별말 없이 와서 설치해 주고 갔다. 요즘 에어컨은 얇은데도 성능이 참 좋더라니 밤낮없이 사용한 8월에도 전기세가 5만 원 정도밖에 안 나와서 감탄하고 말았다. 같은 회사에서 대형가전을 모두 구독했더니 앱으로 조절하기도 편하고 월 사용료도 납득할만한 수준이라 우리 상황에선 잘 선택했다 싶다.
남편이 오고 난 뒤 매트리스와 가구들을 사서 조립하며 집에 구색을 갖춰 나갔다. 몇 년 안 쓸 거니까 중고로 살 거라던 포부는 당근앱을 찾아보다 이내 사라져 버려서 결국 이케아(벗어날 수 없는 그 이름)로 대부분을 채웠다. 미국 집이랑 별반 다를 것 없는 인테리어로 완성하여 안정감을 느끼는 큰 그림이다 생각하기로 한다.
살다 보니 집에 몇 가지 문제가 있어 임대인(70대 어르신)이 몇 번 방문했는데 당연히 사람을 불러서 처리할 거라 생각했던 일을 그 더운 날에 직접 하셔서 좀 놀랐다. 결과물은 미흡하지만 빌려 쓰는 집이니 적당히 감내하며 살아야지 싶다. 다행인 건 아직까지 층간소음 항의가 없고 아파트 단지 안에 놀이터가 많아 아이가 오며 가며 즐거워한다. 이 정도면 괜찮은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