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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ka May 25. 2022

이름으로 깨친 한글

반은 깨쳤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서 슬슬 한글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세 살부터 가족 이름을 쓰고 글자에 무척 관심 있어 보였으나 그림처럼 인식하고 따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다. 작년에 교재를 가지고 한글의 자모 소릿값을 가르쳐보려 했을 때 두어 번 하더니 지겨워해서 그만뒀는데 이제는 때가 된 것 같았다.


해외배송으로 받은 새로운 한글교재를 폈는데 아이의 반응이 영 별로였다. 재미없게 시작하면 배우기 어려울 것 같아 고민하다가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 이름을 가르쳐 주면 어떨까 싶었다. 다음날 아이와 책상에 앉아 좋아하는 친구들 이름을 읽어보고 싶지 않냐고 물으니 쓰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부르는 이름들을 계획표에 적으니 온통 포 패트롤과 페파 피그 친구들이라, 책 속 친구 말고 사람 친구도 몇 명 쓰자고 해서 그것도 넣었다.


한글 배우기 계획표(어느새 낙서가...)


받침 없는 이름들을 앞쪽에 배치하고 하루에 하나씩 배우는 걸 목표로 했다. 그날 배우는 이름의 자모 소릿값을 각각 익히고, 자음과 모음의 배치를 바꿔서 여러 글자를 만들어서 익혔다. [스카이]를 배우면 스커이, 서키으, 소크이 등도 같이 익히는 식이다. 글자를 읽고 만드는 걸로 마치려고 했는데 아이는 자신이 배운 글자를 꼭 펜으로 썼다. 아이가 처음에 말했듯이 쓰고 싶어서 글자를 배우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계획한 7주가 지나자 어느 정도 읽고 쓰기가 가능해져서 아이에게 그림일기를 써보겠냐고 물으니 덥석 응했다. 처음엔 본인이 쓴 글자들이 맞는지 확인받고 싶어 했는데 틀리는 게 당연하고 점점 알아가는 게 재미있는 거라 설명하니 수긍하기는 했다. 다만 불편한 마음은 남아있는 거 같아서 두 개까지는 물어보면 고쳐주겠다고 하는 기간이 몇 주 있었고, 그 후로는 "일기"의 의미에 걸맞게 혼자서 잘 쓰고 있다. 나는 아이에게 허락을 받고 그의 일기를 읽고 사진 찍고 즐거워한다.


어린이 그림일기


일기 쓰기와 함께 책 읽기 및 어려운 자모 5주 과정을 병행했다. 곰곰이책이나 프뢰벨 영아테마동화를 하루 한 권씩 혼자 읽었는데, 가끔 읽기 싫다는 날은 건너뛰고 다 읽은 날은 맘껏 으스대도록 응원하고 있다. 책 읽기를 통해 일기 쓰기에서 틀리는 글자를 인지하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아직 거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소리 나는 대로 쓰는 게 너무 귀여워서 사실 아직은 고쳐주고 싶지 않기도 하다.


여기 사는 동안 아이에겐 영어가 주언어가 되겠지만 한글도 풍부하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부모와도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깊은 대화를 할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봤던 만화책을 아이도 보고 같이 이야기나눌 수 있는 날은 머지 않은 것 같으니 기대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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