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해야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오후, 가게에서 와인 수입사 직원과 와인 시음 미팅을 가졌다. 직원은 레드와인 두 병, 화이트와인 세 병을 가져와 각각을 소개했다. 그중 메를로 품종과 카베르네 쇼비뇽 품종을 섞은 레드와인의 맛이 꽤 마음에 들었다.
피노누아 품종과 리슬링을 블렌딩해 만든 브뤼 정도의 당도를 가진 화이트 스파클링 와인도 가게 메뉴에 새로 추가해보기로 했다. (브뤼(Brut)라는 말은 당도를 나타내는 프랑스어인데 1% 미만의 당분을 함유한 스파클링와인을 브뤼라 부른다. 별로 달지 않다는 얘기.)
직원과의 거래를 끝낸 후 곧바로 전단지 하나를 만들었다. “한잔의 와인, 9000원, 선착순 4분 모십니다”란 메시지를 담은 전단지에 와인을 설명하는 짧은 문구, 전단지에 재미를 더해줄 그림도 그려 넣었다. 와인과 간단한 안주를 함께 테이블에 놓고 사진도 찍어 인쇄했다. 전단지는 입구 옆 입간판 위에 한 장, 1층 유리 출입문에 한 장을 붙였다. 효과가 있을까? 누가 봐주기나 할까?
오늘 시음을 위해 두 모금 정도만 따라 마신 와인은 거의 한 병에 가까운 양이 온전히 남아 있다. 내일이 지나면 아무래도 맛이 떨어져 글라스와인으로 판매하기도 좀 그렇고, 오늘 그냥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생각해 본 이벤트였다.
공급가 자체가 비싼 와인이라 잔당 9,000원에 팔아도 남는 건 거의 없다. 그래도 구입 원가라도 건지고, 홍보도 하고, 손님들에게 와인 맛에 대한 피드백도 듣고, 아무튼 뭐라도 남기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이 와인은 글라스와인으로 팔 수밖에 없는 와인이기에 ‘한잔의 와인’은 그야말로 오늘이 마지막인 ‘이벤트’이기도 하다.
전단지는 과연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그 효과의 내용은 예상 밖이었다. 전단을 1층 출입문에 붙이고 난 후 몇십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두 명의 20대 여자 손님들이 가게를 찾아왔다. 나는 이들을 반기며 문을 열어주고 자리로 안내했다. 편한 자리로 앉으세요.
처음 온 손님들이 의례 그렇듯 그녀들은 가게의 주변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았다. 나는 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 문 앞에 내걸린 ‘한잔의 와인’ 광고문 보고 오셨죠?
- 네? 아뇨. 그냥 오늘 문 연 같아 올라와 봤어요.
- 아, 그래요? 한잔의 와인 이벤트 때문에 오신 건 아니군요.
- 네. 얼마 전에 지나가다가 여기 뭔가 생겼구나 했는데...
이들의 진술(?)에 따르면 2층에 뭔가 그럴듯한 카페가 생긴 것 같긴 한데, 한번 와보고 싶기는 한데, 간판이 켜진 걸 보니 영업을하는 것 같기는 한데, 1층 출입문 너머로 보이는 계단이 너무 컴컴하고 음침해서 왠지 올라가기가 꺼림칙하다. 문 닫은 사무실인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문을 열고 올라오기가 꺼려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보니 출입문에 이벤트 같은 것도 활발하게 하는 것 같고, 가게 주인이 왔다 갔다하며 분주히 움직이는 것 같아 한 번 올라와 봤다는 것이다.
문을 열면 바로 센서등이 켜져 계단이 환해지지만 문을 닫은 채 사람들의 왕래가 없으면 문 뒤의 계단은 미지와 공포의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그녀들은 나에게 귀뜸해 주었다. 사장님, 여기 막상 와보면 분위기 아늑하고 좋은데 올라오는 계단이 너무 어둡고 무서워요. 전등이라도 달아보세요. 그럼 사람들 더 많이 오지 않을까요?
그래도 이벤트를 만들어 전단지도 만들고, 입구에 붙이고, 잘 붙었나 확인하는 요리조리 살펴보는 내 모습을 손님들이 보고, 어두운 계단을 용기 내 올라오고, 올라와 보니 분위기와 와인 맛은 제법 괜찮고, 손님들은 나에게 장사 잘되라고 귀뜸도 해주고. 뭐라도 하니까 작은 일이라도 생기고, 뭐라도 남는구나. 나는 이런 걸 ‘전단지의 나비효과’라 부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