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식기 세척기

초음파 식기 세척기를 사야 할까요

by 마이크 타이프

네... 그런데요, 저희 가게가 규모가 작은 와인바라 설거지거리가 아주 많지가 않아요. 굳이 초음파 식기 세척기까지 설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가격도 좀 비싸구요.


초음파 식기 세척기를 판매한다는 업체에서 전화가 왔다. 어떤 경로로 전화 영업의 간택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영업 총괄본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화자는 제품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열심히 설명을 하던지 중간에 적당히 말을 끊을 타이밍을 찾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잠시 설명이 끊긴 틈을 타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몇 백만 원에 달하는 세척기를 들여놓을 여력도 없거니와 구매 필요성도 크지 않음을 피력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제품 보여드리고 설명할 기회만 주셔도 저는 감사하지요. 언제쯤 시간 되셔요, 제가 바로 한번 만나 뵙겠습니다.


영업맨의 기세에 눌렸는지, 설거지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는 말에 궁금하기도 했는지 나는 그와의 미팅을 잡아버렸다. 내일 금요일 오후 7시에 가게 오픈하는데 그때도 괜찮을지 물었고, 그는 당연히 가능하다는 답을 끝으로 십 여분의 전화통화는 끝났다.


아이고,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어떻게 사준다는 사람은 없고 사달라는 사람들만 이렇게 많은지. 온라인 마케팅업체, 보험회사, 치과, 피부과, 이제는 식기 세척기 업체까지 자기 물건과 서비스를 사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이들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내 와인바에 와달라고 영업을 해볼까나. 나는 과연 얼마나 치열하게 영업하고 있는 걸까.


나라면 이렇게 강렬한 영업을 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이 사람의 영업술에 넘어가 500만 원에 달하는 초음파 식기 세척기를 덥석 구입해 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내저었다. 안된다. 가게 매출도 신통치 않은데 주방 설비에 또 500만 원을 투자할 수는 없다. 집에는 어린 아기가 있고 대출금은 줄지 않았다. 역대급 경기불황에 매일 자영업자들의 폐업 소식을 접하는 상황에서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할 판에 500만 원짜리 식기 세척기라니, 말도 안 된다.


물론 좋을 것이다. 싱크대에 물을 받아 놓고 접시들을 냅다 넣은 다음 작동 버튼만 누르면 초고압 초음파가 기름때, 묵은 때를 박박 닦아주니 나는 그냥 접시들을 물에서 건져 헹구고 건조대에 올려놓았다가 수건으로 슥슥 닦기만 하면 되니까. 마감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거란 그의 말이 제일 달콤하게 다가왔다. 며칠 전 단체 예약 손님들이 남기고 간 영광의 흔적들을 처리하기 위해 한 시간 반이 넘게 설거지만 했던 쓰디쓴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안된다. 처자식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설거지거리가 너무 많이 나올 정도로 손님이 많으면 그때 초음파 식기 세척기를 들여놓자. 일단은 몸으로 때우자. 가장의 어깨가 무겁다.

by hazydrawing


다음날인 금요일 오후 7시가 되자 오후부터 내리던 비는 더 세차게 내렸고, 그즈음 그가 나타났다. 나는 음료수 한 잔을 대접했고, 그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바로 태블릿을 켜더니 제품 설명을 시작했다. 과연 솔깃했다. 기존 구입 업체들의 설거지 해방 영상들을 보니 구미가 당겼다. 그는 나의 흔들림을 포착했는지 설명에 박차를 가했다. 주방에 들어가 싱크대 사이즈를 줄자로 재더니 하루면 뚝딱 설치도 끝난다고 말했다.


대화는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그는 이제 상품 가격과 할인율, 48개월 할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좀 더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그에게 물 한잔을 가져다 드렸다. 설명하시느라 힘드시겠어요. 숨 좀 돌리세요. 그가 한바탕 웃으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는 잠시 딴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 전라도 광주라고 말했고, 나는 사투리 듣고 대충 파악했다고 대답했다. 그가 다시 뭔가 말하려는데 그의 스마트폰 알람이 울렸다. 아까부터 몇 번 울렸던 알람인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스마트폰 화면을 열더니 나에게 보여준다. 네이버 지도 같은 화면이었는데 화면 곳곳에 깃발 같은 게 꽂혀 있고 5,000이니 15,000이니 각기 다른 숫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뭔가요, 내가 물었다.


제가 배달도 합니다. 이 숫자는 제가 이 지역 몇 군데를 다니면 받는 배달 수수료예요. 사실 이 시간에 배달을 해야 하는디 오늘 사장님 뵐라고 배달도 안 가고 이러고 있지라이.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에는 배달 주문이 진짜 많아요.

by hazydrawing


배달까지 하세요? 힘드시겠어요. 힘들어도 우짭니까, 애가 셋인디. 와이프한테 잘못한 것도 많고 암튼 돈을 많이 벌어야죠, 가장이니께. 사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동지애가 느껴지며 나의 파토스가 흔들렸다. 그냥, 계약할까.


약간의 설명이 추가로 이어진 후 나는 그와의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한번 생각해 볼게요, 오늘 제품 설명하시느라 고생 많으셨네요,라는 나의 인사에 세 아이의 아빠는 웃으며 말했다. 네, 생각해 보시고 연락 주세요. 암튼 후회 안 하실 겁니다.


경기 불황이 심해지니 먹고살기가 더 빠듯해졌다. 먹고살기가 빠듯해지면 생계의 딜레마는 더 깊어진다. 내 물건은 많이 팔아야 하고 남이 파는 물건은 사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의 지갑을 열기 위해 아등바등하면서도 내 지갑은 철통같이 닫아야 하는 먹고사니즘의 아이러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했던가, 각자도생이라 했던가. 왠지 모를 건조한 서글픔 같은 게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