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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도서전

책들의 유혹을 조심합시다

by 마이크 타이프

요즘 텍스트 힙이 유행이라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지난 수요일(6월 18일)부터 코엑스 전시홀에서 열린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와 보니 정말 그렇다.



수년 전부터 매년 들러보는 전시회인데 올해는 유난히 사람이 많다. 실제로 행사 주최 측에서는 “입장권이 얼리버드 단계에서 매진되어” 더 이상의 티켓 판매가 중단되었다는 안내 공지를 올리기까지 했다.


미처 대비를 못하고 그저 현장에서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면 되겠지, 하고 방심하고 있었다. 티켓 판매 매진이라는 소식을 듣고 난감해하며 ‘올해는 못 가는구나’ 생각하던 차였다.


우연히 가게에 들른 단골손님과 이런저런 대화 중에 나의 ‘딱한 사정(?)’을 얘기했다. 그런데 단골손님이 어디서 구했는지 도서전 초대권 한 장을 가져다주신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또 있을까.


금요일 오전, 개장 시각인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입장했는데 벌써부터 전시홀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올해도 대형 메이저 출판사들의 대형 독립부스 외에도 중소형 출판사와 독립출판사들이 모여있는 부스들이 다양한 책과 관련 굿즈를 선보이고 있었다. 저자와의 인터뷰 콘서트가 곧 시작된다는 안내방송과 다양한 이벤트 시작을 안내하는 진행요원들의 외침이 뒤섞여 도서전의 활기를 북돋운다.


특히 내 눈에 띈 건 ‘일러스트레이터스 월, <여름의 드로잉>’이었다. 그림을 사랑하는 누구든 참여해 도서전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고 “출판 관계자와의 협업 기회로 만들어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전시 참여를 위해 설치된 가벽에는 이미 그림에 관련한 ‘업’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작품과 포트폴리오, 그리고 각자의 명함이나 연락처를 벽에 붙여 놓았다. 모두 하나 같이 드로잉, 일러스트 실력이 대단하다. 진행요원에게 물어보니 전시회 종료 후 가벽에 붙인 그림들을 모두 수거해 출판 관계자들이 모여 이들을 심사하는 절차를 거친단다.


아차, 이런 이벤트가 있는 줄 알았다면 내 그림 중 잘 그린 그림 몇 장을 출력이라도 해서 가져올걸.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시다 문득 생각이 나 가방에서 평소 가지고 다니던 스케치북을 꺼냈다. 돌아다니다 틈이 나면 이런저런 그림들을 그려놓았던 노트다. 괜찮은 그림 몇 장을 골라 페이지를 북북 찢어 스카치테이프로 가벽에 붙이고, 옆에 내 명함도 붙였다.


일러스트레이터스 월에 그림을 붙여놓았으니, 나도 이제부터 일러스트레이터인가, 아닌가... 그럴듯한 포트폴리오 그림 사이에 연습하듯 끄적인 스케치 페이퍼를 붙여놓으니 왠지 위축감이 들기도 하고, 뭔가 더 독특한 아우라가 풍겨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도전해 보았다’는 점에서 나 자신을 칭찬하면서도 ‘준비된 자가 기회를 얻는다’라는 말을 되새겨본다. 내년에는 좀 더 일찍, 철저하게 준비해 보자.


일러스트레이터스 월을 떠나 출판사 부스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다양한 책, 그것들과 관련한 더 다양한 굿즈와 경품들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역시 책 보는 사람보다 경품에 눈독 들이는 사람이 더 많고, 책 사는 사람보다 굿즈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혹자는 이런 유사 독서 행위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난 좀 반대다. 책은 단순히 책표지와 텍스트들을 인쇄한 종이 묶음이 아니라 책과 관련한 경험의 총체다. 책 보다 굿즈에 더 많은 관심과 돈을 쓰지만, 그러한 굿즈도 ‘책’이라는 오리지널이 없었다면 무의미하고 자질구레한 물건에 지나지 않을까.


도서전에서 가져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 중 하나는 진열된 책들의 저자를 직접 만나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독립출판사들이 모인 부스들에서는 1인 출판사를 운영하며 자신이 직접 책을 펴낸 작가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사진 에세이를 펴낸 독립출판 어느 작가와 잠시 얘기를 나눠보았다. 내 와인바 사진을 보여주며 종종 소규모의 토크쇼를 진행한다고 소개했다. 혹시 종종 강연 따위를 하기도 하시냐, 묻자 작가는 웃으며 네,라고 답한다. 기회 되면 저희 와인바에서도 한 시간 정도 편안한 강연 부탁드리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흔쾌히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나도 그가 좀 마음에 든다. 이렇게 대면하여 몇 마디 나눠보면 대강의 감이 온다. 이 사람이 어느 정도의 ‘강의력’이 있을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스타일은 어떨지.


몇몇 부스를 더 돌아다니며 또 다른 작가들과도 짧은 대화를 시도해 본다. 어떤 작가는 나의 ‘강의 제안’에 흥미를 가졌고, 또 몇몇 작가들은 반응이 시큰둥하다. 나 역시 몇몇 작가에게는 마음이 끌리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사람과의 만남은 참, 이렇듯 묘하고 재밌고, 조금은 불편하고, 조금은 설레고, 또 조금은 피곤하다.


작가 사냥, 아니 섭외 작전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는 진짜 책을 좀 살펴보아야겠다. 평소 대형 서점에 자주 가는 편이었으므로 누구나 알만한 대형 출판사의 베스트셀러들은 그냥 지나쳤다. 여기까지 와서 클레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나 노벨상 수상작가들의 책을 들쳐볼 이유는 별로 없다.


평소 좋아하는 그림 에세이와 소설, 드로잉 실기 관련 책들을 진열해 놓은 부스를 찾아본다. 부담 없이 읽기 좋은 소재들이기에 관련 부스에는 역시 사람들이 많다. 그중 몇몇 책들이 눈에 띈다. 어반 스케치 책으로 나름 유명한 <카콜의 어반 스케치>를 쓴 저자의 신작을 소개하는 부스에 가보니 저자가 직접 사인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곳은 지나칠 수 없다. 책의 내용을살펴보지도 않고 냅다 신작을 집어 들고 저자에게 사인도 받았다.


기분 좋은, 그러나 불길한 신호였다. 카콜의 신작을 한 권 사고 나니 걷잡을 수 없는 책 소장의 욕구가 솟구친다. 내친김에 같은 부스에서 특별 판매한다는 직원의 꾐(?)에 넘어가 <도쿄 상점>이라는 어반 스케치 책을 또 한 권 샀다. 또 다른 부스에선 요즘 런던 베이글 뮤지엄 카페의 마케팅 기획자가 썼다는 <Philosophy Ryo>를, 또 지나가다 <발터 벤야민의 공부법>,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를, 책의 구성과 디자인에 혹해 <the side view of goodbye>를 샀다. 이렇게 총 여덟 권을 사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어차피 다 읽지도 못할 걸 알면서 지갑을 연신 열어재꼈다. 뿌듯함과 후회가 동시에 몰려와 마음이 좀 심란하다.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올라 위안을 삼는다: “책은 다 읽는 게 아니라, 일단 사놓고 책장에 쭉 꽂아놓았다가 조금씩 맛보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그가 미워졌다. 아마 그 말을 접하고 나서 도서 구입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새 세 개로 늘어난 쇼핑백과 밀려오는 어깨의 통증, 오후가 되어 부쩍 늘어난 인파에 피로감이 몰려온다. 서둘러 출구를 빠져나와 지하철을 탄다.


가게로 돌아와 구석진 자리 2인 테이블에 오늘 산 책들과 이곳저곳에서 입수한 홍보물을 진열하고 사진을 찍는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도서전 방문 에피소드와 초대권을 준 단골손님에 대한 감사의 글을 적었다.


어느덧 가게 오픈 시각, 문을 열고 한숨 돌리는데 문이 열린다. 지난번 왔던, 인스타그램 팔로우를 해준 손님이다. 어서 오세요. 하자 손님이 웃으며 말을 건넨다. “오늘 책 많이 사셨던데요?”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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