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능력의 120%를 발휘해야 뭔가를 이룰 수 있다
가게 휴일을 맞아 미용실에 가는 길이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머리를 깎은 지 두 달이 다 되어 가고,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 - 특히 옆머리 - 를 보고 있자니 마음까지 찌뿌둥해지는 것 같다.
단골 미용실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마침 앞에 자리가 나 냉큼 앉는다. 별생각 없이 스마트폰을 열어 유튜브를 본다. 아무런 맥락 없이, 그리고 끝없이 팝업되는 숏츠 영상을 넋 놓고 보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하루에 꼭 한 번씩 쇼츠의 늪에 빠져 몇 십 분씩 허우적거리는지.
아마도 우연찮게 걸리는, 제법 괜찮은 내용을 담은 영상을 보는 맛에 중독된 게 아닐까. 이를테면, 방금 지나친 영상은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터뷰를 편집한 영상인데 이런 내용을 전한다.
사자가 쫓아올 때
가젤이 뛰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 뛰는 순간
가젤은 진짜 가젤이 되는 거예요.
... 가끔은 자기 능력을 120%로 발휘해야 하는 때가 있죠.
그런 순간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요.
맞는 말이긴 한데, 정말이지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한 이 말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심지어 어디에 어떻게 내 능력을 120% 발휘해야 할지도 모를 때가 많다. 스마트폰을 끈다. 잠시 눈을 감고 들판에서 목숨 걸고 뛰는 가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미용실에 도착했다. 나름 유명세가 있는 미용실이라 그런지 평일인데도 손님들로 북적인다. (내 가게도 이랬으면 좋겠네!) 헤어 디자이너를 만나기 전, 한 스태프가 반갑게 인사하며 샴푸실로 나를 인도한다. 전에 봤던 스태프가 아닌 것 같다. 180도로 펴지는 일인 소파에 바로 누워 머리를 스태프에게 맡긴다.
그녀가 능숙한 솜씨로 내 머리를 감기고, 약간 찬물로 헹군 후 두피 지압을 해주는데! 뭔가 다르다. 이전에 받아 보았던 두피 지압과는 확연히 다르다. 두피의 혈을 제대로 알고 누르는 것인지, 그야말로 쿨(cool)함이 다르다. 쿨 샴푸를 쓰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머리가 쿨해질 수 있다니! 샴푸 담당 스태프들에게 종종 팁을 건네는 경우가 있다던데, 바로 이럴 때를 말하는 건가.
샴푸를 마치고 헤어컷 의자로 향했다. 정기적으로,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는 헤어디자이너와 역시 반갑게 인사하고, 몇 마디 안부와 일상 다반사에 대한 약간의 수다를 나눈다. 그리고 곧 나는 입을 다물고 눈을 감는다. '샴푸-안부 인사-눈 감기-헤어컷', 이건 뭐랄까, 의식(ritual)에 가깝다. 이렇게 저렇게 깎아주세요, 라는 말도 필요 없다. 디자이너는 이미 다 안다. 이게 단골의 편안함, 단골의 즐거움이다. 그저 그녀에게 머리를 맡기고 눈을 감으면 스멀스멀 졸음을 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삼십여 분이 지났을까.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디자이너의 말을 듣고 눈을 뜬다. 그리고 말쑥해진 머리를 한 번 바라본다.
다시 샴푸실로 향했다. 이번에는 다른 스태프가 인사를 하고 소파에 누운 나의 머리를 감긴다. 아까 그... 두피 지압의 달인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목 뒤에서 후끈한 시원함이 몰려온다. 뭔가 다르다. 샴푸를 마치고 으레 잠깐 해주는 목 마사지가 아니다. 신신파스 핫(hot)을 붙인 것도 아닌데 후끈하면서도 개운한 맛이 그야말로 일품.
알고 보니, 그녀만의 비법이 있었다. 우선 아주 뜨거운 물에 자신의 손을 달군 후 손님의 뒷목과 두피를 있는 힘껏 눌러 지압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한다. 이러다 뜨거운 물에 손이 데이는 건 아닐까, 손가락 관절염이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지경.
감동한 나머지 내가 물었다. 방금 하신 지압, 본인이 개발하신 건가요? 그녀가 쑥스럽게 웃으며 답한다. 네, 나름 연구하고 연습해 본 거예요. 아, 네... 정말 시원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송구합니다. 팁이라도 건네고 싶지만 현금을 안 가져왔습니다.)
샴푸 후에는 다시 컷팅 의자에 앉는다. 디자이너가 마지막으로 내 머리를 손본다. 어디 더 다듬을 곳은 없는지, 워낙 실력이 좋은 디자이너인데도 언제나 그렇게 꼼꼼하게 살핀다. 정성스레 머릿결의 방향을 미세하게 조정하며 드라이, 그리고 향 좋은 왁스로 그루밍. 나는 별다른 말 없이 디자이너에게 엄지척을 건넨다.
즐거운 헤어컷 타임이 끝났다. 언제나처럼 디자이너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두 명의 샴푸의 요정-아니, 여왕-에게도 인사를 건넨다. 그러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문득 그녀들에게 물었다. "저기, 제가 사실 인물 스케치를 하는데요, 두 분 스케치해 드리고 싶어요.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그녀들은 약간의 당황과 약간의 기분좋음이 섞인 웃음을 지으면서도 흔쾌히 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해주었다. 나는 급히 그녀들의 사진 한 장을 찍는다.
미용실을 나와 오월의 오후 햇살 가득한 거리를 걸었다. 경쾌한 걸음으로 카페를 지나치다 문득 카페 창문에 비친, 말쑥하게 다듬어진 내 머리를 바라보는데! 목숨 걸고 뛰는 세 마리 가젤의 모습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