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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수의 왕 Jul 18. 2020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오랜만에 박장대소하며 책을 읽고 있습니다.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중단편이나 밀란 쿤데라의 초기 단편들에서 느꼈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재치들이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또 동시에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인류를 사랑하는 거인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부분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젊은 시절,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질풍노도처럼 밀려드는 이런 생각이 있었을 듯싶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불굴의 모험적인 호기심이 그의 모든 감각에서 불타오르고 불꽃이 흔들거린다. 여기서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어 - 이렇게 단호한 목소리와 유혹이 울려 퍼진다"


그리고 니체는 곧바로 우리가 박차고 나가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그리고 집에 라는 말은 그가 지금껏 사랑해온 모든 것을 의미한다!"


<성숙한 자유정신 그리고 위대한 해방> 이 단어들에 대해 무한한 동경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 단어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니체의 책에서 위의 문장을 본 순간, 제 스스로 그토록 갈망해왔던 정체 모를 무엇인가의 의미가 아주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곱씹다 보니, Tracey Emin의 한 작품이 머리속으로 떠오르는데, 아래 보이는 이 기묘한 <텐트> 입니다.


<Everyone I Have Ever Slept With 1963–1995>


작품 내부 디테일


자신의 애정행각에 대해 작가 스스로의 자백처럼 보이는, 그래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이 도전적인 제목의 의미는 사실은 이렇습니다.

자세히 보면 제목 끝부분에 연도가 표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죠. 자신이 태어난 해인 1963년부터 이 작품을 만들어 낸 1995년까지 문자 그대로 자신이 한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잔 모든 사람들에 관한 기억입니다. 

가장 먼저 부모와 가족이 있고, 어린 시절 밤새 키득거리며 함께 sleep over를 했을 친구들이 있고 그리고 당연히 자신의 연애 상대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텐트(집)는  작가 자신이 사랑하는, 믿어 온 그래서 안심하고 같이 잠을 잘 수 있는, 다시말해(니체식으로) "그녀가 지금껏 사랑해 온 모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텐트 안에 적힌 이름들은 자신이 사랑해 온 모든 이들의 집합이 되는 것이겠죠.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Some I'd had a shag with in bed or against a wall some I had just slept with, like my grandma. 

I used to lay in her bed and hold her hand. We used to listen to the radio together and nod off to sleep. You don't do that with someone you don't love and don't care about"


가장 마지막 부분에 작가의 작품에 대한 확실한 선언이 있죠. 

"You don't do that with someone you don't love and don't care about"

<개념미술>의 "개념"을 아주 잘 보여준  중요한 작품이었던 이 "텐트"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컬렉터 사치의 미술품 창고가 화재로 불타버렸을 당시 다른 대부분의 사치의 소장품들과 함께 재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전설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트레이시 에민이 의도했던 "개념"을 이 작품보다 먼저 발견했던 적이 있는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입니다.

주인공 토마시는 테레사와 함께 잠을 자는 것에서 궁극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프라하의 모든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다니는 이 공기보다 가벼울 것처럼 보이는 이 남자의 사랑은 그러나 겉보기와는 다르게 자신이 누군가의 안전한 쉼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테레사는 자신의 잠자리에 프라하의 모든 여성들이 풍기는 체취가 넘쳐흐르는 것에 참을 수 없이 무거워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지요.




우리가 마주치는 인생의 많은 순간들마다 우리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향기들을 맡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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