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십 살 김순남 Jun 19. 2022

사랑이어라



천천히 다가갔다. 아.. 모두 젊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들이 간절하다. 어여쁜 여인이 빠르게 다가와 내 손에 뭔가를 쥐여주고 간다. 섬찟 놀랬지만 상황을 짐작했다. 분명 소문을 들었던 거다. 그사이에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런 상황이 연출될 리가 없다. 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이 내 머리로, 이해 가능한 일이 있었던가.  아.. 생각났다. 나에게 금붙이며 지폐를 쥐어줬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내 손에 놓고 간 것은 예쁜 머리핀이었다. 젊은 사내가 멈칫멈칫 다가와 사진 한 장을 두 손으로 내민다. 암말 안 하고 나도 두 손으로 받았다. 사진 속에는 선남선녀가 어깨를 맞대고 활짝 웃고 있다. 사내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떠난다.           


소녀가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머금고 나를 본다. 소녀가 나에게 내민 것은 장갑이다. 아.. 순간 소녀를 본다. 맑은 눈동자가 물기에 젖어 수정처럼 영롱하다. 소녀는 나에게 슬픈 미소를 주고 떠난다. 총총 걸어가는 그녀를 뒤돌아본다. 그러고 보니 소녀의 옷차림이 두텁다.  소녀는 추운 날 이곳으로 왔구나. 먼 길 떠나는 어린 딸이 손 시릴까 봐 챙겨 주셨구나. 아.. 그랬구나.. 눈물이 자꾸만 흘러서 주체를 못 하겠다.      


아직 한 여인이 남아있다. 그녀만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나에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분명 나에게 줄 것이 있어서 온 것일텐데..     


내가 다가갔다. 그래도 그녀는 얼굴을 들지 않는다. 그녀 손에 쥐어진 것은 사진이다. 기다리다 내가 손을 뻗었다. 그제야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사진을 내민다. 내 손이 사진에 닿자, 놀란 듯 사진을 도로 뺏어간다. 그녀 손에 들려진 사진 속을 본다. 보행기에 타고 있는 두 갓난아기의 웃음이 있다.      


아, 내 억장이 무너진다. 그녀는 사진을 나에게 주고 싶지 않다. 그녀가 사진을 나에게 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나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듯 서 있다. 나에게는 그녀에게 조언해 줄 자격도 능력도 없다. 그 마음에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녀를 비켜 갔다.      


무너져 내린 억장을 추스르며 걷다가 뒤돌아봤다. 그녀가 거기에 그대로 서 있다. 그 모습에 다시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참을 머물러 그녀를 본다. 그녀에게로 다시 갔다. 그녀의 두 손에는 아직도 사진이 있다.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체념하듯 사진을 내 손바닥에 놓는다.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한다. 그녀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쳐다보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나에게 주고서도 그녀는 돌아서지 않았다. 내가 돌아서 왔다. 애써 뒤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걸었다. 한참을 걸은 후 뒤돌아봤다.      


그녀가 안 보였다. 갑자기 다리가 풀린다. 주저앉아 엉엉, 대성통곡을 했다. 하늘도 땅도, 지천으로 피어있는 라일락꽃도 무심했다. 그냥 아픔이, 슬픔이 사라질 때까지 울어댔다. 눈물은 치유의 묘약이다.     


'훌훌 털고 가세요. 아픔도, 상처도, 슬픔도, 기쁨도, 희망도, 절절한 그리움도 모두..새로운 맑은 영으로 다시 태어나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예요.‘


작가의 이전글 처녑과 산채나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