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골딩의《파리대왕》(1983) 읽고
어떤 특정 분야의 책만 가려 읽고 있다고 느꼈을 때,
문득 독서 방법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립도서관 독서동아리의 문을 두들겼다.
나의 노크에 문이 열렸을 때, 처음으로 동아리의 선정도서를 만났다.
그 책이 바로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1983)이다.
사서 선생님이 건네준 책 표지에 턱수염을 기른 작가의 사진만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혼자서 절대로 골라 읽지 않을 스타일을 갖춘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독 할 수 있었던 것은 편식하듯이 하고 있는 편독에서 치우치지 않고 두루 읽기 위한 편독으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오랜만에 접한 고전이라 그런지 눈과 머리 그리고 뇌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집에서는 도저히 집중이 안되어 도서관으로 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창가 자리를 골라,
그 감성에 기대어 책을 조금만 더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앉았다.
도서관에 도착하기 전까지 전쟁 중 아이들을 피난 보내기 위해 출발한 비행기가 사고로 무인도에 추락하는 장면까지 읽었는데, (책의 완전한 초반부이다) 도서관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다 읽었다.
민음사 출간 책 P.83 ~ P.104 『색칠한 얼굴과 긴 머리카락』
'랠프는 눈을 반짝이고 입을 벌린 채 손에 넣은 지배권을 음미하였다.
(중략)
랠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이 웃음으로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타협이 되어가자 화가 났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멧돼지를 모두가 둘러쌌을 때 그들이 알게 된 사실.
한 살아있는 생물을 속이고 자기들의 의지를 거기에 관통시키고, 맛있는 술을 오랫동안 빨듯이 그 목숨을 빼앗아 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생생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인도에는 '소년'들만 있다. 전쟁과 고립으로 시작하는 소설에서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탐구하기 위한 목적인지 배경은 섬만 나오고, 등장인물은 소년들 뿐이다.
소설의 초반부 민주적인 방법으로 무인도의 생활을 시작한 소년들이 투표를 통해 리더를 선출하고, 역할 분담을 위해 모두 모여 토론을 진행한다.
질서의 유지와 토론의 발언 순서를 정하기 위한 장치 '소라 껍데기'도 마련한다.
하지만 리더 랠프는 사냥만을 중요시하는 잭의 무리와 금방 갈등하기 시작한다.
처음 멧돼지 고기를 맛본 소년들은 사냥을 위해 무리 지어 다니기 시작하고, 리더의 지시에도 따르지 않는다.
얼굴에 붉은 칠을 하고, 먹지도 않을 멧돼지 머리를 잘라 나무에 꽂기도 한다.
잘린 멧돼지 머리에 섬에 있는 파리들이 모여 들끓기 시작한다.
멧돼지 머리는 파리대왕(베엘제붑)으로 분하여 상상 속에서 말을 걸기도 한다.
사냥에 가담하지 않고, 리더를 따르는 소년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도망치는 랠프(리더)를 죽이기 위해 섬에 불을 지른 잭의 무리.
아이러니하게도 구조를 위해 불을 피우는 데 동참하지 않았던 잭의 무리가 피운 불을 본 해군 장교가 우연히 섬에 방문한다.
해군 장교를 만난 랠프는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못하고 펑펑 운다. 랠프를 쫓던 잭의 무리 역시 눈물을 흘리며 소설이 끝이 난다.
소년들을 모으기 위해 랠프가 불었던 소라는 권한과 민주주의 제도를 상징한다.
고립된 소년들이 처음 소리에 굴종하였던 이유는
기존에 따르던 규칙, 명령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칙의 범위에서 벗어나 사냥을 시작한 잭의 무리들이 리더의 명령에 저항했던 것은 처음 사냥에 성공하며 느낀 흥분이 내 안의 본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다수가 된 잭의 무리에 맞서 고독하게 싸운 랠프의 이성적인 모습이 인류가 지나온 수많은 전쟁과 역사들을 되돌이켜보게 만들어 준다.
때로는 생존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다.
생존과 가치의 붕괴,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보게 만들어 준 책이자
앞으로 더 다양한 종류의 책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본성을 자극해 준 책이 바로 윌리엄 골딩의《파리대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