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1818 초판)(1831 개정판)을 조금씩 읽고 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창조물을 끔찍하게 여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어느 캠프에서 만난 유아교육과 교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닮아있는 사람에게 분노를 하고, 혐오감을 가진다는 이야기였다.
반대로 자기 자신과 닮지 않은 사람은 그런 이유로 동경할 수도 있고,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다고.
동의하지 않는 듯 고개를 흔드는 내게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르거나, 인생을 충분히 살지 않은 것이라고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자신의 창조물을 끔찍하게 여기는 모습은, 그가 창조물에 자신의 야망과 두려움, 그리고 악함을 투사했기 때문일까. 그는 괴생명체를 만들며 자신이 신과 같아지길 꿈꿨지만, 결과물은 그의 예상과는 반대로 불완전하고 기괴했다. 어쩌면 통제 불가능한 결과 역시 그 자신을 향한 혐오와 맞닿아 있을 수 있다.
내가 누군가의 단점이나 결함을 봤을 때,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다면 분노나 혐오감이 들 수 있다. 산책을 할 때 맞은편에서 걷던 이가 바닥에 침을 뱉는 모습을 봤을 때, 갑자기 가래가 끓어 바닥에 뱉었던 아침의 내 모습처럼 느껴져 거부감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 행동이나 결함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며 불편함을 느낀 것이다. 침을 뱉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그 사람은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었고, 그로 인해 무의식적인 거부감이 촉발된 것 같다.
부서 회식에서 상사의 권유로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마시고 주정을 부렸던 내 경험이 회식 후 늦게 들어오는 아내에게 투사하며 모질게 질타했던 적도 있다. 내 약점은 받아들이기 힘들면서, 아내에게 나와 같은 주정이 있을 수 있다며 갈등을 일으킨 것이다.
반면, 나와 다른 사람이 새롭거나 이상화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어서 호감이나 동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무언가를 결정하기 전에 3일 이상 심사숙고하는 내가 어떤 결정이든 3분 이내에 실행할 수 있는 아내에게 끌렸던 것처럼 말이다. 이성적인 면이 1도 없는 딸을 보면 어떤 행동을 해도 귀엽고, 깜찍하다. 반면에 나를 닮아 고집 있는 아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경쟁심이나 불편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 내가 자녀와의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투사하거나 비교할 때가 많다면, 조금 더 독립적인 개체로 바라보려는 시도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아들의 고집이 나와 비슷하더라도, 그 뒤에 숨은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아들에게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잠시 멈춤'해야 그 감정을 솔직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