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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난을 고이 접어 1화

세운빌라 403호

by 박병수

세운빌라에선 아빠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매일 밤 술에 취해 4층까지 계단을 오르며 욕을 뱉고 소리를 질렀다. 주민들은 창문 너머로 고성을 들으며 짜증을 냈지만, 아빠에게 직접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장에서 일하다 한쪽 눈을 잃고 부당해고까지 당한 뒤, 퇴직금조차 못 받은 사연을 다들 알았다. 그 불쌍한 눈초리가 우리 집 현관 앞을 지나갈 때마다 느껴졌다.


빌라엔 늘 소식이 돌았다. 어느 집 아빠가 잘렸다더라, 사업이 망해 도망갔다더라. 그래도 불행 대결에선 403호가 늘 승리했다. 엄마는 아빠의 주정을 견디다 금방 집을 나갔다. 중학교에 막 들어간 누나와 나만 남았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자식을 맡기고 떠난 마음이 어땠을까. 하루를 그냥 버티기도 힘든데, 술만 먹으면 때리고 욕하는 사람 곁에 더 있을 수 없었을 거다. 그래도 3~4년마다 한 번씩 찾아와 얼굴을 비춰 용돈이라고 돈을 쥐어줬으니 아예 연을 끊은 다른 집 엄마보단 나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운동회 날이나 소풍날이 찾아오면 엄마를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건 늘 텅 빈 문소리였다. 텅 빈 문소리만큼 사람 기운 빠지게 하는 소리가 없었다.


엄마가 떠난 뒤 집은 점점 더러워졌다. 청소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깐. 먼지 쌓인 바닥과 기름때 묻은 주방을 바라보며 누나를 원망했다. 누나는 할 줄 아는데 하지 않는다는 점이 나와 달랐다. 저녁이면 직접 계란을 부칠 때도 있었고, 나더러 라면을 끓이라고 시킬 때도 있었다. 항상 같은 메뉴로 저녁을 해결하며 우리는 결핍에 천천히 익숙해졌다. 빌라 주민들의 동정 어린 눈초리도 자연스러워졌다. 아빠의 소란 덕에 이웃집 아저씨가 아내와 다투다 웃음을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이 우리 집에만 머물러주길 바라며 기도하는 이웃집 사람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에이 씨팔, 내가 진짜 죽어버려야지."


1층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밟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쿵 뛰었다. 누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나는 잽싸게 이불을 뒤집었다. 펴둔 이불은 늘 꿉꿉했고,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난의 냄새가 났다. 집엔 문이 달린 장소가 누나 방과 화장실뿐이었다. 나는 주방 옆 안방에서 아빠와 잤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숨을 멈추고 생각했다. 열쇠가 문고리에 긁히는 소리, 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는 아빠가 혹시 넘어질까, 욕이 더 커지지는 않을까 겁이 나기도 했다.


누나의 방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 사이 아빠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제처럼 화장실로 가서 오줌을 누고, 세면대에 발을 올려 한참을 씻었다. 멀쩡할 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그렇게 씻냐고. 아빠는 발을 씻지 않으면 간지러운 병이 생긴다고 했다. 그걸 놔두면 온몸이 가렵게 된다고. 가난 같았다. 술이 원인인데, 술을 막지 않으니 집이 점점 가난해졌다. 발을 씻고 나온 아빠는 이불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아빠의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이 집에서 영영 나갈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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