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죄송하지만 이 놈한테 정이 좀 떨어져서요. 환불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큰 고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고친다고 해도 다른 사람한테 가는 게 낫겠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언제 가져오세요. 환불해 드릴게요."
며칠 후에 다시 찾아갔다.
환불을 받으려니 좀 죄송한 마음도 있고 해서
달콤한 디저트라도 하나 사서 갈까 했다가
적당한 것이 생각이 안 났고
뭘 좋아하실지도 몰라서 빈 손으로 갔다.
이런 오래된 물건은 원래 고장이 잦다면서
수리를 받는 과정까지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내 기분 탓인지 몰라도
그의 말투에서 차가움이 느껴졌다.
환불된 금액은 다시 통장에 찍혔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래 가지고 있던 라디오는
다른 문제로 또 수리를 맡겼다.
나의 빈티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저 이쁘고 상태 좋은 놈을 소유하려 했을 뿐
그 오래된 물건에 대해 너그럽지 못했다.
사물에 대해 '정이 떨어졌다.'는 표현을 하면서도
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의 기분과 연관 짓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그 사물의 존재를 66년 동안의 시간과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시각으로 상상해보게 되었다.
1955년 서독 베스트팔렌의 어느 공장에서
끼워지는 부품들과 직공들의 분주한 손들.
어느 가정의 나른한 공기를 깨웠던 독일 말 뉴스 소리.
매일 먼지를 털며 아껴 주었던 주인.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밀려나 어느 중고 매장의
선반 위에서 쌓여가는 먼지.
늙어가는 수리공의 정성으로
우리말 FM이 깨끗하게 잡힐 때
노화로 찾아온 자신의 이명이
고쳐지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시간 속에서 대상들의 존재와 연관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자
사물과 사람에 대한 보다 넓은 아량과 사랑이 느껴졌다.
그날 저녁에 메시지를 썼다.
"여태 빈티지 물건들을 대할 때 저에게 주는 현재의 가치만 따졌지 그것이 버텨온 세월과 그동안 아껴준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없었네요. 제가 눈이 침침해져 가는데 누가 눈이 고장 났다고 '정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셔서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날 오후가 되어 문자가 왔다.
"심성이 부드러우신 분이로군요. 라디오 수리는 완료하였습니다. 편하신 시간에 찾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