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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태국인 친구 차지아룬 와라판

2025 안성맞춤 시민동아리_무지개 코딱지 [무지개 책장] 수록

by 마일로

와라판을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서른일곱쯤 되었던 것 같다. 나이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외국인 억양으로 밝게 건네던 “안녕하세요!”

우리는 언제나 웃으며 서로를 맞이했다.

작년, 태국 여행을 떠나기 전 와라판님을 꼭 만나고 싶었다. 일요일 점심식사 후 이불에 몸을 반쯤 기대고 누워 있다가, 그녀에게 문자 한 통을 보내고는 무작정 출발했다.

추석연휴쯤이었는데 와라판님은 식당을 열고 있었다. 혼자 먹기에는 많은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함께 식사를 하며 밀린 이야기와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태국 언니들의 공동육아가 종종 생각난다. 와라판님을 중심으로 태국이주민 분들이 정기적으로 모였고, 나도 자주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태국의 놀이문화를 알려주고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그들은 늘 밝고, 너그럽고, 곱고, 따뜻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렸던 엄마들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녀들은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었고, 태국어로 나눈 대화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알려주었다.

함께 음식을 나누며 웃었고, 모두 여유롭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언제나 다정했다.

그 후로 시간이 꽤 흘렀지만, 와라판님과의 인연은 이어졌다.

5년 전쯤, 일하는 곳이 겹치면서 자주 만나게 되었고 서로 힘든 시기에도 우리는 늘 다정하게 맞이했다. 와라판님이 이주여성 쉼터 일을 그만두고 처음엔 지쳐 보이던 그녀였지만, 그날 오랜만에 만난 와라판님은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부드럽고 편안한 얼굴로 나를 맞았다.

아이와의 방콕여행을 걱정하는 나에게 그녀는

“블로그에 나와요. 걱정하지 말아요. 일단 가봐요!”

그녀의 한마디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늘 한국의 소식을 전하는 입장이었던 내가 그날은 큰언니 같은 와라판님에게 위로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이주민으로서 한국에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의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군 사람들이 얼마나 단단하고 의연한지. 오래전 태국 이주민 모임에서 언니들이 고향 음식을 만들어 나누며 내게 말했다.

“선생님, 태국 비빔국수예요. 맛봐요!”

그녀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 아들 환이는 ‘보물찾기’ 시리즈의 태국 편을 보며

방콕의 에메랄드 사원을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20년 전에 다녀온 곳이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 와라판님은 식당 안쪽 서랍에서 에메랄드 불상 브로치를 꺼내 선물로 주었다.

여행을 응원해 주는 태국인 이모 덕분에 아이는 에메랄드 사원에 갈 때

기쁜 마음으로 옷깃에 브로치를 달고 다녔다.

여행이라는 낯선 경험이 나를 얼마나 바꾸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예전보다 더 자주, 이주민 친구들의 삶의 품이 자랑스럽다.




무지개책장 엽서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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