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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oe 쏘에 Aug 26. 2020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파라과이에서 음악교사로 봉사한다는 것

파라과이에서 난 중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중학교에는 기존 음악 선생님이 있었고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음악 교과서도 없고 악기는 더더욱 없고 CD 플레이어도 사용하지 않는 교실에서,

유일하게 음악 시간이구나,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교사의 노랫소리.

아이들은 전지에 매직으로 써놓은 가사를 보고 교사의 시창으로 노래를 배웠다.

다행히 우리 음악 선생님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구체적으로 학교 측에서 내게 원한 것은 학생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기관이 이런 것을 원했다면 음악 전공을 한 중등 음악 교사로 봉사단원을 요청했어야 하는데, 

난 초등교육, 중등미술교육 전공이었다.

고민에 빠졌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할 것이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할 것이냐....

결국 난 학교 측에서 원하는 것을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음악 전공이 아닌 내가, 악기를 전혀 접해보지 않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악기는 리코더였다. 그래서 전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에서는 리코더를 가르치기로 했다. 

그리고 원하는 학생 대상으로  특별활동으로 피아노, 우쿨렐레, 카혼을 가르치기로 했다. 

다행히 어릴 적 오랫동안 피아노는 배웠고, 우쿨렐레는 코이카 합숙 훈련을 하면서 배웠고, 

카혼은 유투브로 배울 수 있으니.... 

특히 인기가 많은 악기는 피아노였다. 

코이카 사무소에서 전자피아노를 대여했고 개인별 연습할 수 있는 10개의 멜로디언이 있어서 10명의 학생을 받으려 했으나 신청한 학생은 훨씬 많았다.


‘바이엘 상’을 편집한 책으로 레슨은 시작되었다. 

처음 나오는 ‘도레도레도’, ‘도레미도레미도’를 치기 위해 오선 악보에서 도, 레, 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사분음표, 이분음표, 온음표를 알아야만 한다. 즉 오선악보를 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솔’이 나오면서 배우러 오는 아이들은 반 이하로 줄었다. 아이들은 악보를 보려하지 않았다. 

나는 한국의 음악시간처럼, 악기를 배우려면 악보 읽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생각했다. 

악보 보는 법을 한번 배워놓으면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도 아이들 스스로 악기를 연주할 수 있고, 새로운 악기도 쉽게 배울 수 있다. 노래도 악보를 보고 부를 수 있다.

그래서 계속 익히도록 강요했다. 프로젝터를 설치해야하는 수고를 마다않고 항상 악보를 보여주며 가르쳤다. 시험도 보고 말이다.


시험을 본 후 특활반 아이들은, 특히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한 학생들은 거의 다 배우기를 포기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왜 이 아이들은 배우려고 하질 않는지,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지....

결국 이 반은 해체되었다. 

하지만 교장샘이 소질과 끈기가 있는 소수의 아이들로 합주반을 만들어 행사때마다 공연을 하라고 하셨다. 

전체 아이들 대상으로 하는 리코더 수업도 진행해야만 했다. 


그래서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오선보를 버리고, 정간보로 가르치기로 했다. 

원래 이곳 음악시간에 했던 것처럼 계이름을 적어서 가르치되, 정간보를 사용하면 음의 길이(주로 한 칸이 사분음표)도 표시할 수 있으니 좀 더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것마저 어려워했다. 정간보 두 칸(2분음표)과 4칸(온음표) 정도는 박자를 이해했지만, 한 칸에 두 개의 계이름(8분음표)이 들어가 있는 것조차도 어려워해서 가능한 모든 곡을 4분음표만 있는 4박자 곡으로 바꾸어 가르쳤다. 

우쿨렐레를 위해서도 쉬운 코드가 반복되는 곡만 골랐다.


이렇게 나름대로 포기하고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우리 밴드에서 가장 우등생인, 모두에게 귀감이 되어 가장 영향력 있는, 우쿨렐레의 나디아(Nadia)가 합주반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서투르지만 나름대로 조금씩 발전해서, 모든 학교가 모이는 지역 행사에서 ‘환희의 송가’와 ‘에델바이스’를 연주하기로 한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너무나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연구실 책상에 엎드려서 울었다. 코워커인 에베(Eve)가 위로를 해 주었지만 눈물이 더 펑펑 쏟아졌다. 

그러게 처음부터 기관장은 초등교사인 내게 중학생 음악을 가르치라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말았어야 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아이들을 데리고 공연을 위한 밴드를 조직하라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잘 할 수 있는 것보다 기관에서 원하는 것을 하기로 결정한 나도 싫고, 기관장도 원망스럽고 모든 것이 다 속이 상했다. 

가르치겠다고 애쓰는데 자꾸 배우기를 포기하려는 아이들에게 나는 뭐를 더 어떻게 더 해야할 지, 갈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내가 운다는 소식을 들은 나디아가 찾아와서 미안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만두지 않겠다며 나를 달랬다. 

그녀가 그만두지 않는다니, 안도했다. 

책상에 엎드려 울다가 일어날 때, 그 부끄러움은 온전히 내 몫이었지만.... 


며칠 후, 나디아의 엄마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교감선생님과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나디아의 엄마도 내가 울었다는 것에 당황하신 듯했다. 귀한 손님 씨암탉 잡는 어머니처럼, 집에서 기르던 오리를 잡아 요리를 해주셨다. 엄청 큰 오리 다리를 주셨는데 처음 먹어보는 쫄깃한 식감이었다. 민망하지만 참 맛있게 먹었다.


나디아의 집에서 난 그녀가 왜 밴드를 그만두려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디아는 학교에서 전 과목 성적이 우수하고 학교 행사에도 꼭 참여하는 적극적인 아이이다. 행사 때마다 학생의 대표 격으로 항상 진행을 맡는다. 겸손하고 친구들도 잘 도와주어서 모든 교사와 아이들에게 신망이 두텁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 항상 바쁘다.

그런 아이가 집에서는 공부가 아닌 집안일을 해야만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디아의 집은 학교와 제법 먼 곳에 있었다. 가축이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들판이 넓은, 마을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이가 아주 많은 아버지는 나디아 엄마(몇 번째 부인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와의 사이에 나디아와 나디아의 오빠, 이렇게 두 명만 두었는데, 일을 하기에는 쇠약했다. 꼴을 먹이러 들판으로 나갔다가 해질녘 집으로 몰고 들어와야 하는 소떼는 오빠가 돌보고, 집에 있는 돼지, 닭, 오리, 개, 고양이 등은 나디아가 관리해야 했다. 집에는 가축 말고도 채소밭, 갖가지 과일나무들이 있어서 그것도 그녀가 엄마와 함께 가꾸었다.

나디아가 동물들에게 여물을 주고 우리를 청소하느라 바쁜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학교에서 방과 전(그녀는 오후반 학생이었다), 밴드 연습을 따로 해야 하기때문에 집에서 그만큼 일하는 시간도 적어졌고 과제 할 시간도 부족했다.

 

나디아가 이런 상황이라면, 다른 아이들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나절 공부하고 반나절 농업교실에서 농법을 배우는 아이들은, 특별활동반에 들어와 악기를 배우려는 시도도 못했으니....

밴드는 졸업이나 진학을 위해 점수를 따는 학교의 과목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도 아이들이 악기를 계속 쳤으면 좋겠지만,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마도 다시는 칠 일이 없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그렇다. 악보를 보는 것을 배울 이유가 없다. 악기를 배울 이유도 없다. 여유도 없다.  


나디아의 집에 다녀온 후 나는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 한다는 욕심을 버렸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가르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었다.

   

전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리코더는 정간보도 버렸다. 

계이름을 불러주며, 내 손을 보고 구멍을 막는 모양을 따라하게 했다. 

피아노로 반주를 녹음해서 틀어주니 아이들이 연주하는 서툰 리코더 합주도 그럴듯해졌다. 

그냥 그렇게 한 곡 연주하게 되면 아이들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나도 더 이상을 원하지 않았다.


밴드는 종종 공연이 있었기 때문에 주 2회 따로 연습시간을 가졌는데, 아이들에게 각자의 악기를 빌려주고 집으로 가져가서 연습하도록 허용했다. 파손이나 분실의 위험이 있었지만, 그것도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분실은 되지 않았다. 우쿨렐레 현이 끊어진 것은 새로 갈았고, 멜로디언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그냥 다른 멜로디언으로 대체했다. 

내가 이곳을 떠난 이후를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현재 아이들이 경험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나의 ‘열심’이 다른 이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최선의 것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다.

 

잔뜩 움켜쥐고 있었던 것을 내려놓으니, 모든 것이 힘들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 연주곡을 쉽게 바꾸는 것이 오히려 재밌었다. 

특히 협주를 위한 각 악기의 파트곡을 만드는 것은 수업연구가 이렇게 신나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봉사단원의 2년 활동을 보여주는 마무리 자리인 현장사업 기증식까지 아주 더디게 '오블라디 오블라다'와 '아리랑'을 협주로 완성했다. 

모든 협주의 메인 가락은 리코더로 연주했다. 오블라디 오블라다는 멜로디언이 베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아리랑은 느린 아리랑에서 빠른 변주곡이 두 개 붙는 것을 만들었는데, 느린 아리랑은 우쿨렐레를 가락으로 가야금 느낌이 나도록 연주를 했고, 빠른 아리랑은 우쿨렐레를 반주로 흥겹게 연주했다. 

박자 감각이 뛰어난 디에고(Diego)의 안정적인 카혼 연주 덕에 변박 연주가 가능했다. 


기증식에 참석한 코이카 소장님 외 한국인 내빈들이 우리의 연주를 무척 좋아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곡으로 수도에서 열리는 코이카의 동문회의 밤 행사에 초대받았다. 

코이카에서는 아이들이 편하게 올 수 있도록 간식까지 넣은 버스를 보내주었고, 수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아이들은 몹시 흥분했다. 

교장 선생님이 밴드 아이들에게 교복 셔츠를 선물해 주신 덕에 모두가 희디흰 셔츠를 입고 멋지게 공연 무대에 섰다. 아이들은 공연 후 럭셔리한 뷔페로 대접받고 코이카 티셔츠도 선물 받았으며 소장님과 직원들로부터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가는 버스에서도 그랬지만 돌아오는 버스에서,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이 경험을 아마 오래오래 간직할 것이다. 

그 행사 이후로 밴드 연습은 끝이 났지만, 아이들은 내게 연습을 언제 다시 시작하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이 중 어떤 아이는 이후에 스스로 다시 악기를 배울지도 모른다.

물론,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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