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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 mei mi Aug 02. 2020

동대문 연대기-15.그들만의 리그(4)

- 나의 데님 로드 (My Denim Road) -





< 이미지 출처- 픽사 베이 >








오전이나 점심 식사 이후에 진행하던 회의가 며칠 전 변경됐다. 다 같이 차를 타고 외부로 나왔다. 

사무실이 있는 답십리에서 압구정의  돈가스 집으로 갔다. 식사 후 카페로 들어가 회의를 했다. 사

장님께서는 회사가 그렇게 죽도록 일만 하는 곳은 아니라고 하셨다. 퇴사 전 회사의 다른 면을 보

여 주려 하신 부분은 감사했지만, 당시 생산 확인을 도맡아 하던 내 동선은 더 멀어졌다. 더불어 그

밖에 처리해야 하는 업무와 퇴근 시간도  미뤄졌다. 나를 비롯한 이전에 퇴사한 디자이너들의 퇴직 

결정 요인은 과도한 업무량 때문만이 아니다. 


"실제로 만나보니  내가 또라이니?" 


입사 초반 회의시간 은연중 대화속에 흘린 그 말이 나는 너무 뜬금 없었다. 그러나 일주일정도 지나

자 어떤 의미인지 알게됐다. 시장에 대한 정보가 없던 내게만 들리지 않았던 진실. 모두가 꺼려하는

이유를.






퇴사를 말하고 채용공고를 올린 지 4주가 지났는데,  한 사람도 면접을 보러 오지 않았다. 사장님께

서는 내게 주변을 통해서라도 알아보라고 하셨다.  거래처에 여쭤보았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이미 시장에 소문이 나서... 데님 디자이너는  거기  갈 사람 없어요. 아마 

면접을 누가 보러 온다고 해도, 이 바닥 모르는 신입이거나 다른 계통에서 일하던 사람일 거예요."



얼마 후 수요일. 처음으로 면접자가 왔다. 남자분이었다. 외근하고 복귀하는 지하철에서, 막 면접을 

끝내고 돌아가는 그 사람과 마주쳤다. 사무실로 들어오니 면접자에 대한 칭찬 일색이었다.  듣던 대로 

지원자는 타 분야에서 일하던 분이었다.  젊고, 키 큰 남자라 일 부리기도 쉬울 거라고 좋아하셨다. 사

장님께선 무엇보다 내가 받는 월급만큼 제시했는데, 크게 만족하며 돌아갔다고 했다. 이틀 뒤엔 한 명

의 지원자가 더 있다고 하셨다. 이제라도 조금씩 면접자가 나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오늘은 성수동으로 가자고 하셨다. 메밀국수를 먹었다. 두 번의 외부 식사를 얻어먹기가 미안해 나는 

커피를 샀다.  오후 5시쯤 회의가 끝났다. 거래처 퇴근 시간은 6시였다. 업무를 서둘러 보고 다른 행선

지에 가야 했다.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 동화상가로 가서 부자재를 픽업했다. 이어서 망우리의 봉제 공장

에 들린 뒤, 답십리의 메인 공장으로 왔다. 다음 순번 청바지에 들어갈 굵은 지퍼를 전달하고, 현재 진행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지퍼를 건네 드렸다.



"이거 아닌데?! 검은색이 와야 하는데.."



지퍼 양옆으로 옷에 부착하기 위한 띠(tape)가  달려 있다. 몸 판  색상에  함께  맞추는데, 이번 

작업은 검은색 원단이라  띠도 동일하게  맞춰야 한다. 그런데  파란색이 아닌가! 평소 픽업시에 

실장님께서 팩스로 보낸 발주서를 현장에서 확인 후 가지고 갔다. 그런데 오늘은 늦게 끝난 회의 

일정에 마음이 급했다. 지퍼 개수만 확인하고 가져갔다.  하필 이게 문제가 되다니... 내일 생산 예

정에 차질을 빚게 됐다. 즉시 실장님께 보고 드렸다. 확인해 보니 발주는 제대로 됐지만,  거래처에

서 실수를 한 거였다. 사무실에 도착했다. 실장님께서 내가 잘못된 부분을 잡아냈다면, 생산 시간 손

해를  덜 봤을 거라고 하셨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업무에 따른 질책을 넘어 욕설과 도 넘 은 인신공

격이 시작됐다. 내가 꼼꼼히 확인 못한 과실이 있기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다.




핸드폰으로 사장님께 전화가 왔다. 봉제 일정이 밀린 손해에 대해 말씀하셨다. 특수한 한 가지 방법

만을 고집하는 회사의 워싱 스타일은 대략 5일, 지연되면 일주일 넘게 걸린다. 그래서 다른 생산 일

정에서 돌발 상황이 생기면 최종 납품 일자가 더 지연된다. 민감한 문제였다. 사장님께서 갑자기 전

화를 끊고, 사무실 전화로 걸어오셨다.  다시 질책과 고함 소리가 들렸다.  또다시 전화를 끊으셨다. 

이번엔 실장님의 핸드폰을 통해 스피커폰 상태로 들으라고 하셨다. 또다시 질책과 고함소리, 인신 공

격. 두 분의 말씀대로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실장님께서 퇴근하셨다. 시재 정리를 하고 문서 작성을 마무리했다. 갈아 놓은 랭글러 리벳과 청바

지 몇 개를 들고 완성 공장에 전달해 드렸다. 밤 10시 50분. 공장을 나와 참았던 서러움이 복받쳐 올

라왔다. 내가 잡아내지 못 한 거래처의 실수로, 업무 질책을 넘어 인간 이하의 처우를 언제까지 받아야 

하는지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토록 내가 쓸모없다면  당장 내보내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회사도 알고 

있었다.  데님 디자이너는 이 회사에 오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분야의 정보가 없는 신입을 뽑

는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못 버티고 나가는 상황이 계속 발생하는 곳이다.  내가 입사할 당시 전임자

에게 인수인계를 못 받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였다. 사장님의 전화와 문자가 빗발쳤다.  언제나 퇴근 없

이 걸려오는 사장님과 실장님의 전화는 내겐 이미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처음으로 사장님의 전화와 문자에 답하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지만 평소 멘토로 생각하는 원단 업체 사장님께 전화드려 상황을 말씀드렸다. 자초

지종을 들으시고, 당장 나오라고 하셨다. 전화 이전에 내 마음속에서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후임자가 오기 전에 내가 피 말라죽겠구나. 극한의 공포를 느낀 이후에 또 다

른 선택은 없었다. 자존감은 바닥보다 더 깊은 아래로 처박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이었다. 회사에서는 내 나이와 가정환경을 한없이 부족한 핸디캡이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쓸모없고, 운 나쁜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것은 사장님과 실장님의 가스 라이팅이

었다. 내가 퇴사를 말씀드렸을 때 사장님께선 나를 집으로 따로 부르셨다.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핸드폰 통화 기록을 내 눈앞에 빠르게 가져다 보여 주었다.




"너 이게 뭔지 알아? 네가 이제껏 시장에서 다닌 회사 거래처랑 내가 통화한 내역이야. 너에 대해

서 알아봤어. F 업체는 낮 시장에서도 장사 잘 되는 곳이라 디자이너 계속 필요한 곳이라던데, 널 

왜 잘랐을까? 여기 완성 공장에 전화했는데, 너 이름 기억조차 못 하던데? 너 그렇게 존재감이 없

는 애였니? 




" 사장님.. F 업체의 완성 공장은 **인데요."




"그래? 아, 여기 둘이 형제 지간이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그리고 권고사직당한 회사 원단 거래처 

사장님께 전화했어. 근데 너만 잘렸다던데? 거기 막내 디자이너는 계속 일 한데. 네가 스스로 나

온 회사 이사하고는 나랑 친구 사이야. 직접 물어봤어. 너는 스스로 나왔다고 하지만, 실은 너 자르

려고 생각 중이었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사장님은 약간의 사실과 다수의 거짓을 섞어 내게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회사의 명칭을 넣어, 

일어나지 않은 일을 발생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추후에 알게 된 사실은 이랬다. F 업체는 

부진한 매출로 나를 해고한 후에는 디자이너 충원을 하지 않았다. 권고사직한 회사의 막내 디자이너는 

진로를  md로 바꿔 쇼핑몰에 취업해 있는 상태였다. 또한 T 원단의 사장님께는 나와 막내 디자이너의 

거취를 물어 왔을 때, "잘 모른다."라고 답한 게 전부였다. 디자인에서 배제되고 옷을 만들수 없어 퇴사

한  회사는 새로 부임하신 실장님 마저 몇달뒤 퇴사하시고 이후엔 아무런 디자이너도 가지 않는 곳이 되

어 있었다. 하지만 이 당시의 나는 이 얘기에 답변 했다던 사람들에게 진위 여부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나 스스로가 덜떨어지고 모자라서 해고와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줄 뿐이었다. 시간이 좀 

흘러 나를 걱정하던 거래처 사장님께 전화를 받고, 이 같은 회사 사장님의 행동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었다.




"그 회사 사장이 거짓말을 잘해. 개 나한테도 한 번 그랬었다 욕 엄청 먹었어. 나한테 말도 안 되는 

모함 누가 했냐고, 어떤 새끼냐고 내가 이름 대보라고 하니까. 못 대지. 이 바닥에서  알만한 사람

내가 다 아는데.  혹시 몰라도 이름만 대면 건너 건너 전화번호도 다 알아낼 수 있으니까. 나이 먹고

좀 변했나 싶었는데  그대로네."




이 말을 내가 그 당시 들었다면.. 아니 처음부터 입사 자체를 안 했다면 나의 불행이 연이어 벌어

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한 선택이었다.  그에 따른 결과도 온

전히 나의 몫이었다.







다음날 오전 출근길. 이른 아침부터 회사 사장님께 문자와 전화가 왔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의 고함 소리는 공포였다. 통화 하지 않아도 내 귀에 내내 울리고 있었다.회사로 가서 짐

을 챙겼다. 내가 가지고 있던 시재 잔액과 영수증 그리고 사용 내역을 정리한 문서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담당해서 발주한  부자재의  리스트와 현황과 인수인계 사항을 적어 책상 위에 놨

다. 실장님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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