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기미 씨벌, 오늘 300명 넘게 들어왔다는데 19명이 뭐야, 19명이…… 지랄, 나도 돈만 있으면 저깟 등대, 솔바람 다 잡을 수 있다고. ……끙, 얼른 언덕배기 땅뙈기 사서 컨테이너라도 올려야 할 텐데. 저, 저년 봐라. 가족 회의하는데 넌 잠이 오냐?”
거칠고 원색적인 말, 착남은 벌써 취한 모양이다. 준비할 게 더 많은 저녁상을 마치고 소씨 아저씨 집으로 넘어왔다. 식당에서 손님이 남긴 회와 가리비로 소주를 마셨던 착남은 이제 표고 튀김을 안주로 맥주를 마시고 있다. 횡설수설은 혼자 다 하면서 억지로 술을 마신 엄마가 쓰러지자 착남이 앉은 채로 발로 밀었다.
“그래, 처자라, 자. 그래야 내일 또 일하지. 야, 플러스 원! 내 누누이 말하는데 밥값 제대로 해. 오갈 데 없는 병신에 딸린 자식까지 거두었으면 죽는시늉이라도 하란 말이야. 씨발, 어디서 눈을 부라리고…… 어라, 왜 일어나?”
“숙제하러요.”
“지랄, 내일 예약이 30명인데 숙제할 정신이 어딨어? 자빠져 자라. 아니면 술이나 따르든지……”
“오래 안 걸려요. 시비만 안 걸면 40명도 잘 할 수 있어요. 성질……”
“저, 저년이 주제도 모르고 따박따박 말대답은……”
나는 학교에서 지원받은 태블릿을 들고 후다닥 뛰어 재빨리 슬리퍼를 신었다. 다행히 머리채를 잡히거나 등짝을 후려 맞지 않았다.
2층 방문이 더러 열려 있고 말과 웃음소리가 떠다녔다. 어른거리는 불빛을 보고 있자니, 행복이 있다면 저런 풍경일까 싶다. 여행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부럽기만 했다. 손님들은 주로 아래층에서 먹고 위층에서 잔다. 우리가 살았던 방까지 손님용으로 바꿨으니 원룸 3칸, 투룸 1칸이다. 등대펜션이나 솔바람펜션 같이 바다 전망이 아니고 집도 낡았으나 음식 맛으로 버티는 편이다.
뜻밖에 식당이 환했다. 인색한 착남이 어째 불 끄는 걸 잊었을까 싶었는데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죽이고 바짝 귀를 세웠다. 낮은 말들 사이의 익숙한 음성, 나는 까치발을 하고 창문 안을 엿보았다. 역시 책방지기 팀이었다. 그들은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둥그렇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디언, 비트, 작약, 월든 같은 단어를 말하며 서로 미소 짓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들의 단어로 말하자면,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이제 새로운 읽기로 들어가는지 책방지기가 일어섰다. 몇 쪽입니다. 하면서 주위를 돌려보는데 영화에서 본 성경 공부 장면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착하지 않아도 돼. 참회하며 드넓은 사막을 무릎으로 건너지 않아도 돼. 그저 너의 몸이라는 여린 동물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게 하면 돼……
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책방지기가 첫 구절을 읽는 순간 뭔지 모를 기운이 내 가슴을 쓰윽 훑는 것 같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벽에 바짝 붙었다. 낭송은 마음속 동물, 절망, 날아가는 기러기, 누구든, 외롭든, 상상, 세계라는 시어들로 이어졌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상은 너의 상상에 맡겨져 있지. 저 기러기들처럼 거칠고 흥겨운 소리로 너에게 소리치지. 세상 만물이 이룬 가족 안에 네가 있음을 거듭거듭 알려주지.
책방지기가 낭송을 마치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뜨거운 감정이 훅 솟구치더니 찝찔한 액체가 내 볼을 탔다. 순식간이었다. 스스로 당황한 나는 박수 소리를 방패 삼아 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어두운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 나는 태블릿을 열었다. 기러기 관련 시로 검색했더니 ‘메리 올리버’라는 이름과 함께 방금 들었던 시가 나왔다. 다시 시인의 이름을 넣어 검색한 시 여러 편을 읽었다. 익히 아는 꽃이나 채소를 그려내는 표현이 새롭고 산뜻했다. 작품 세계나 시인 이야기도 읽으며 그녀가 어린 시절의 성폭행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노래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놀라운 건 성폭행 가해자가, 사회적으로 한없이 고상한 신사, 친아버지라는 거였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싶었다.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내 삶이 힘들다 보니 위로가 되었다.
나는 섬을 벗어나고 싶고 뭘 해도 먹고살 수 있겠다는 자신도 있다. 하지만 엄마가 붙들려 있는 이상 도망갈 수 없다. 어렸던 나는 엄마의 볼모였고 지금은 엄마가 나의 볼모다. 착남에게는 언제나 원 플러스 원. 인터넷 상담소에 고민을 올린 적도 있는데 댓글 창이 분노와 연민으로 부글거렸다. 하나같이 무슨 80년대 얘기도 아니고 당장 신고하라고 난리였다. 고마운 충고였으나 착남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완전히 삭제하지 않는 이상 그는 엄마와 나를 끝까지 찾아낼 것이다. 그동안 들었던 말로 미루어볼 때 이미 전과도 있으니, 감옥도 겁내지 않을 위인이다.
스마트폰을 넣으려다 대화창을 열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주르륵 떴다. 담임이 보낸 게 1건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민지 것이었다. 수업 내용과 쉬는 시간 수다에 급식 메뉴까지, 거의 실시간 중계였다. 민지는 내가 메시지를 제때 읽지 않거나 답장이 없어도 개의치 않았다. 마주 앉아 카푸치노를 마시면서도 조퇴 이유를 포함한 내 개인사를 묻지 않았다. 민지를 만난 이후로 나는 급식 왕따를 벗어났고 숍인숍 독서 모임도 기웃거릴 수 있었다. 일방적인 도움을 받는 게 불편했던 내게 민지는 친구라는 한마디 말만 던졌다. 우정이란 굳어버린 땅에 스며드는 빗물인 걸까, 나는 민지와 다니면서 내 처지를 잊고 잠시나마 웃을 수 있었다. 그런 날이 올 수 있다면, 이제 나도 카페에서 음료를 사고 숍인숍에서 책도 한 권 골라주고 싶다.
얇은 합판 너머에서 드드득 끌리는 소리가 났다. 식탁과 의자를 정리하는 듯했고 책방지기와 다른 여자들의 말이 섞였다. 이내 불이 꺼지고 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밖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나는 익숙해진 어둠을 더듬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배가 고픈데 오이밖에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쏟아졌던 빛을 닫고 으드득거리며 오이를 씹고 있자니 다시 눈물이 났다. 그래도 착남이 잠들기 전엔 방에 들어가기 싫었다.
나는 다 먹은 오이 꽁다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날숨을 길게 쉬었다. 두 손을 얼굴에 댔다. 마른세수하는데도 물기가 느껴졌다. 나는 다시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뱉었다.
태블릿을 열어 그동안 쓰고 다듬었던 숙제, 경험 이야기글을 읽었다. 내용도 문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에게 제출하는 일기처럼, 포장이 겹겹이었다. 나는 주방에서 나와 식당 의자에 앉았다. 나는 내가 주인공인 글을 모두 지우고 <살인자의 집>처럼 P라는 인물을 설정했다. P와 P의 엄마, 그리고 Q. 호흡이 가빠지는데 마음은 차분하고 복잡한 머릿속과 달리 손가락은 빠르게 움직였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식당 안이 갑자기 환해지는 바람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아주 짧은 순간 여기가 어딘가 싶었고 저 사람은 누군가 싶었다.
엄마였다. 내가 있어서 무척 놀란 모양이었다. 어버버, 어버버거리며 내 쪽으로 황급히 다가왔다. 웬일이냐고 몸 언어로 물었더니 엄마가 시계를 가리켰다. 아뿔싸, 벌써 새벽 5시였다. 아침 밥상을 차리기 위해 일을 시작할 때였다. 내가 태블릿을 붙들고 밤을 새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만지는 엄마 손을 잡았다.
“엄마, 나는 괜찮아. 이제 일하자. 엄마는 밥 안쳐야지. 나는 나물부터 데칠게.”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7시간을 꼬박 앉아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먹지도 자지도 않았는데 좀 자란 것 같았다. 이상했다. 어젯밤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 같았다. (섬의 섬 4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