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머물러 주면 좋을 텐데, 바쁘게 떠나려는 가을은 찬바람과 함께 찾아온 겨울에게 일찌거니 자리를 내어주려 한다. 가을 단풍을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낙엽으로 만나야 하다니, 성급한 가을만큼 무심한 시간도 빠르게 흐른다.
찬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작년 가을에 찾아온 안면마비가 꼭 찬바람 때문인 것처럼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설명을 들었음에도 괜히 찬바람이 무서워졌다.
모자를 샀다. 평소에 모자를 쓰지 않던 사람이 어지간히 겁이 났나 보다. 머리를 스치는 찬바람이 느껴지면 겁이 덜컥 나는 기분이라니,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을 텐데 아직도 변한 모습을 마음으로 다 받아들이지 못했나 보다.
모자가 잘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다. 한여름에 산에 갈 때나 쓰던 모자다. 그런데도 일상에서 모자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난 무엇을 그리 겁내고 있을까. 혹여, 또다시 같은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은 아닐는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더니, 딱 그 꼴이다. 이미 잃은 소는 어쩔 수 없지만 남은 소는 지켜야 할 테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다.
어울리지 않아도 굳이 모자를 쓰고 출퇴근을 한다. 찬바람이 머리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마스크까지 쓰고 나서면 눈만 내놓고 다니는 모습이다. 남들은 멋으로 쓰는 모자지만 멋과는 상관없다. 꽁꽁 싸매고 나서는 모습이 우습다. 어쩌다가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상황에 맞게 필요한 것을 채우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다. 모자가 있어서 찬바람을 막을 수 있고 조금이라도 더 잘 어울리는 모자를 고를 수 있으니 그것도 좋다. 안면마비를 겪지 않았다면 모자를 써 볼일이 있었을까?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루 이틀 모자를 쓰고 다니다 보니 또 적응이 된다. 처음에 답답했던 느낌은 따뜻함으로 다가온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어색해해도 남들은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내 생각과 마음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