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예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예 Aug 31. 2023

무지개를 봤다. 그리고...

산책하는 진저캣

1. 노을


누군가 하늘에 주스를 쏟은 듯해서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하늘이 보여주는 다채로움은 피로한 일상과 잡스런  세상일을 잊게 했다. 잠시 하늘을 멍하니 보면서 생각했다.

‘매일 행복한 건 아니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는 곰돌이 푸의 밀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은 매일 반복되고 있구나. 그동안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잊고 있었어.’

8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초등학교 친구 모임인 ’ 우정팔찌‘팀과 인천에 갔다. 내가 조개구이를 먹어보는 게 소원이라고 해서 친구들이 바로 가성비 좋은 조개구이집을 예약해 준 거다. 마음이 예쁘고 고마운 친구들!

식비는 우리가 모으는 회비에서 냈지만 나의 소원을 위해 모아둔 돈과 시간을 써주어서 감동했다.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그러겠는가? 역시 친구들 뿐이다.

우리는 노을을 보자마자  감탄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어릴 때는 노을을 보면 예쁘다는 생각만 했는데 이제는 쓸쓸하고 슬프다. 왠지 허무하고 공허한 마음이 들어. 늙어가는 내 인생 같고 그래. “

나의 말에 친구들도 입을 모아 그렇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느닷없이 서울로 이사를 온 아홉 살부터  노을을 보면 슬픔이 차올랐다. 창신동 주택의 옥상에 올라 황홀하게 퍼지는 노을을 보면서 저 속으로 떨어져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지독하게 외로웠고 살아있다는 게 지긋지긋하고  서글펐다.

옥상에 올라가서 종이비행기를 접은 뒤   “거기 누구 있나요? 내 이름은 000이에요 “라고 써서 날리기도 했다. 누군가 나에게 대답해 주길,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나타나길 간절히 바라면서 밀이다. 안타까울 정도로 순진한 염원이었다.


2. 무지개

오늘은 운전을 하다가 커다랗게 뜬 무지개를 봤다. 비가 살짝 내리는 하늘에 큰 반원을 그린 무지개를 보면서 신호 대기 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드디어 빨간 불이 켜졌을 때 후다닥 핸드폰 속 네비가 켜진 창을 닫고 급하게 사진을 찍었다.

지인과 저녁 약속을 잡은 식당에는 우리 앞으로 대기가 한 팀 있었고 그 덕에 건물 사이의 무지개를 여유 있게 찍을 수 있었다.

무지개는 아가의 방긋 웃는 얼굴 같았다.

소품샵에 진열된 예쁜 인형이나 키링, 스티커 같았다.

언제나 미소 짓게 하고 볼 때마다 막연한 설렘을 품게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쯤에 새로운 초등학교가 지어졌다. 그래서 무더기의 신입생들이 그 학교에 전학을 가게 되었고 나도 거기에 속했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가 즐거웠고 친구들과 노는 것도 재밌었다. 그러나 학교를 마친 뒤 버스를 타러 갈 때면 다시 우울해졌다. 엄마가 내게 차비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무리에서 슬금슬금 떨어져 나와 끝없이 길게 느껴지는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걷는 게 건강에 좋지? 아유 착하네.”라는 엄마의 칭찬에 감격했던 나는 묵묵히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땀을 흘리고 갈증을 느끼고 추위에 벌벌 떨며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녔다.


그래도 학교로 가는 길이 좋았다. 엄마는 나에게 영문 모를 짜증을 내거나 인상을 쓰는 게 대부분이었고 아빠와 오빠들은 거칠거나 무관심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 대한 가족의 태도는  마당에서 키우는 개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던 것 같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엄마는 종종 약수를 받아오라며 나를 산으로 보냈는데 그때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숲 속의 산열매나 꽃을 허겁지겁 따먹곤 했다. 나는 늘 배가 고팠고 내 몫의 식사는 다른 가족 구성원보다 못했다.

나는 허기짐이 싫었고 내가 태어난 게 싫었고 이 삶이 끝나기엔 아직 살아야 할 날들이 많은 게 싫었다.


어느 날,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산을 넘다가 앉아서 쉬는데 무지개를 봤다. 어쩌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서 지루하고 지긋지긋한 길을 걸으며 종종 공상에 빠지곤 했으니깐.

어린 나는 키가 크고 다리에 힘이 생기고 돈을 갖게 된다면 무지개의 시작점으로 달려 가리라 다짐했다. 그 시작점에서 무지개 중간까지 낑낑대고 올라간 뒤 내리막길에선 미끄럼틀을 타듯 신나게 내려가서 다시는 엄마가 있는 곳으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무지개를 보며 현실의 탈출을 꿈꾸지 않는다. 노을을 볼 때처럼 슬픔과 허무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무지개는 루지, 놀이공원, 여행, 별, 산책, 바람과 같이 행복하고 설레는 키워드가 되었다.


나이가 드니 퇴색되는 것들이 있다. 물론 저절로 그리 된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절대적이고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끊어내며 속이 숯처럼 타면 트라우마처럼 부정적인 에너지를 뿜는 것들도 바래지는 것 같다.


아무튼 무지개를 봤다. 노을도 봤다.

그리고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복숭아를 깎아 먹고 영화를 볼 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