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의 서늘한 마음
차라리 겨울을 기다리며
한동안 큰 고민거리와 결정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아니, 내가 붙잡은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 만들지 않으면 안 생길 고민들도 때로 애써 만들어야 한다는 게 고달프게 느껴졌다. 또, 그런 일들은 미뤄두면 인생 어느 시점에서 결국 마주한다는 것을 늦은 나이에 깨닫는다. 뭐 그렇게 복잡하게 살아? 응, 미뤄봐야 나중에 더 복잡해지더라.
행복은 자려고 누웠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는 거라 했다는 공부왕찐천재 홍진경 씨의 말에 움찔했다. 나처럼 생각을 멈추는 게 어려운 스타일은 그게 엄청 어려운 일인데 상당히 막막했다. 더위보다 서늘한 마음에 잠들지 못하는 새벽이 계속되고 내 작은 아이들의 여름은 그 사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일상을 같이 잃는 건 아닌지 내 스트레스가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두려워졌다. 가을이 오려나 하면 여전히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아직 여름인가 돌아보면 싸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어디를 걷는지, 왜 또 뛰고 있는지, 매일이 숨차게 느껴지고 숨은 끝까지 쉬어지지 않았다.
어느 새벽, 피로를 이기고 살아남아 잠든 아이들을 들여다보는데 미안함이 밀려왔다. 첫째의 방학은 며칠 남지 않았다. 뭐라도 해줘야 하는데 싶어 벌떡 일어난 나는 한참을 뒤져 적당한 공연을 예매했다. 아이들과 하루를 함께 보내기로 결심했다. 갑자기 너무 그리운 어떤 일상을 찾고 싶었다. 마치 그 결심을 절대자에게 들킨 듯 일상이 조각조각 찾아왔다. 아침에는 오랜만에 한 친구와 통화를 하며 약속을 잡았고, 아이들과 나는 공연과 점심을 함께 했으며, 오는 길엔 늘 보고픈 친구네에 얼굴을 비쳤다. 집에 돌아온 나는 버려둔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올리기도 했다. 그 스토리에서 시작된 디엠들로 갑자기 내 손은 빨라졌다. 며칠 전이나 오늘이나 내 상황은 개운하게 해결된 것도 크게 달라진 것도 없지만, 마음의 일부분은 온기가 도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잠이 안 온다는 둘째의 목소리에 너희가 자야 엄마 수면시간도 당겨진다고 그랬더니 첫째가 둘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엄마가 어른이긴 하지만 혹시 성장호르몬이 하나라도 나올 수 있으니까 우리 빨리 자자."
"?!"
너희 엄마는 40대에 접어들었고 이미 취침시간은 늦어져 11시를 향해 가는데 이 무슨 엉뚱한 소리인지 몰라도 결론적으로 빨리 자면 좋은 거니까 못 들은 척 가만히 있었다. 엄마는 성장호르몬 안 나와, 너네 성장호르몬이나 걱정하렴. 나올 뻔한 빈정거림은 역시 꿀꺽 삼키길 잘했지. 키가 아니더라도 아직 성장할 부분이 꽤 많은 것도 사실이니 혹시 이거 팩폭인가 싶어 돌아본다.
분명 잘만 보이던 내 휴대폰 화면이 갑자기 꺼졌다. 십수 년의 데이터가 축적된 아이폰을 등지고 새롭게 세팅하는 번거로움을 극복해가며 널 데려왔건만 얼마나 됐다고 이럴 거냐. 그것도 서비스센터가 조금 전에 닫았을 시간인 토요일 오후에 갑자기 까만 화면을 마주한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계좌이체, 운동 예약, 장보기, 아이 등교 전 자가진단,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일들을 오직 휴대폰 하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늘 작은 화면에 갇혀 생활하다가 강제로 벗어나니 아날로그 맛에 나름 자유롭고 즐거웠다 싶어야 이게 스토리가 되는데 현실은 끝장나게 불편하다.
아이들은 서랍 속에서 꺼낸 옛 휴대폰(=애니콜)을 찾아서는 전화하는 흉내를 낸다. 아이들은 그 오래된 휴대폰을 엄마 젊은 시절의 신기한 낭만 정도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예전 기억들을 들춰보면 언젠가의 내가 더 단단했던 듯 하다. 복잡할 때 복잡해지지 않고 마음이 덥든 서늘하든 평온하게 살아내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