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피스 자원봉사자 이야기
코로나 전, 유난히 따뜻했던 어느 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호스피스 병동의 특성상 연세 지긋하신 꽃님들이 대부분이다. 아흔이 넘었다고 해서 삶에 대한 미련이 없겠는가, 살아온 시간의 축적에 정비례, 반비례라는 수치를 겨눌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비교적 젊은 꽃님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오면, 마음이 더 깊이 아려오곤 한다. 의사나 간호사, 사회복지사는 직업적으로 마주하는 환경이기에 어떤 마음일지,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함께 하는 봉사자들은 마음이 쉽게 동화되곤 한다.
아이들을 원래 예뻐하지 않는 내가, 수업시간에 학생으로 만나는 아이들에겐 정을 가득 주곤 한다. 대치동의 특성상 어린 나이부터 극선행을 달리고 있는 학생들이 참 대견하다. 어려운 문제를 마주한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도전하는 네가 참 똑똑한 것 같아. 선생님이 봤을 땐 아주 작은 힌트 하나면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해.”라고 말하며 문제도 다시 읽게 하고 작은 힌트를 주며 아이 스스로 완성해 나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 준다. 기다리며 격려하고 칭찬하는 과정이 서로를 성장하게 한다고 느낀다.
그런데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을뿐더러 출근한 느낌이 난다며 싫어하기까지 한다. 학원 건물을 나서면, 강사라는 이름표를 떼버리고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의료진들은 젊은 환자를 보면 어떨까? 매일 보는 환자 중의 한 명으로 무던하게 일을 처리할까? 바쁜 업무 중에도 생각나고 더 신경 쓰이는 아픈 손가락이 될까?
이십 대 초반의 젊은 꽃님을 만나고, 나는 내 일상의 일부에 꽃을 심어 놓은 것 같았다. 월요일 단 몇 시간 동안 마주치는 것뿐인데 내 일상을 파고들었다. 출근하면서 마음 한편에 자라고 있는 작은 백합꽃을 보았다. 백합 같던 그 꽃님은 잘 지내고 있을까?
퇴근하는 신나는 발걸음 옆에도 마음속 백합꽃은 쑥쑥 자라고 있었다. 백합 꽃님이 오늘 밤 부디 아프지 않기를.
처음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시작했을 때, 수녀님이 말씀하셨다. “병원에서 생긴 마음은 모두 병원에 놓고 집에 가야 하는 거야.”
그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었다. 그러다가 내 일상에 작은 백합꽃을 심고 난 후 수녀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스물세 살의 백합꽃님을 처음 봤을 땐, 호스피스에서는 생경한 어떤 생기 같은 것이 있었다. 다인실을 사용하면서 늘 커튼을 친 채로 외부와 교류하고 싶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봉사자들이 다가가 어떤 게 필요한지 물으면, 병실 침대에 엎드려서 핸드폰 게임을 하다가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필요한 거 없어요.”
가끔 냉소적인 꽃님들을 만나곤 하는데, 타격감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마음이 쓰인다. ‘많이 힘드신가 보다’하고.
냉소적인 꽃님들이 차츰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 종종 겪어왔다. 그래서 타격감이 없는 것 같다.
백합꽃님도 그랬다. 처음엔 눈도 마주치지 않았었다. 곁을 지키고 있는 약혼자와 이야기하거나 핸드폰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그랬던 백합꽃님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하게 기력이 떨어져 갔다. 늘 그렇듯 도와드릴 게 있는지 묻자, 처음으로 발마사지를 청했다. 부기 때문에 하체가 불편하다고 했다. 발마사지를 시작으로 조금씩 가까워져 갔다. 한동안은 걸어 다니기 힘들 만큼 쇄약 해졌었다. 그땐 침상에 누워서 할 수 있는 샴푸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래도 끝까지 목욕만큼은 다른 사람의 손을 거부했었다. (한가해지는 오후 시간에 엄마와 단 둘이 목욕실에서 목욕을 했다.)
긴 터널을 지나는 듯 보였던 백합꽃님이 1~2주간은 반짝 생기가 돌던 날이었다. 처음 봤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거동은 가능해질 만큼 컨디션이 차올랐다.
사회복지사님이 의료진과 협의해서 이벤트를 준비했다. 병원 내에 있는 성당에서 작게나마 결혼식을 계획한 것이다.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가 늘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호스피스로 온 이후에는 혼인신고라도 하겠다는 걸 백합꽃님이 말렸었다고 전해 들었었다. 그 마음이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내가 봉사하는 월요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 결혼식이 진행되었고, 차주에 사진으로 결혼식을 볼 수 있었다. 백합꽃님은 예쁜 긴 머리 가발을 쓰고 하얀 웨딩드레스도 입었다. 드레스의 품이 많이 남을 만큼 앙상한 모습이었지만, 처음 보는 꽃님의 표정이 그 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완벽한 행복이라는 게 이런 걸까.
두 손 가득 박수치며 축하를 드렸고, 법적으로 혼인신고는 안 했지만 괜히 더 ‘남편, 아내’라는 호칭을 사용해 드렸다.
그런데 그 행복했던 2주를 뒤로 한 채, 백합꽃님은 급격하게 힘을 잃어 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봉사자들에게 목욕을 요청했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 내가 처해보지 않고는 모를 것이다. 그래서 내가 호스피스에서 하는 공감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극히 이기적인 공감이 아닐까.
목욕실에서 목욕을 준비하고 꽃님에게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목욕탕에 온 듯 다 같이 옷 벗고 목욕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 봤던 초코파이 광고가 생각났다. 투병하는 친구를 위해 똑같이 삭발하고 털모자를 쓰고 병실에 나타났던 장면이 떠올랐다.
초코파이 생각은 내버려 둔 채, 팀원들과 정성껏 목욕해 드렸다. 그 이후로도 두어 번 목욕을 해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보이지 않았다.
봉사가 시작하기 전에 입원 환자에 대한 브리핑이 진행된다. 복지사님을 통해 진행되는 시간인데, 지난 한 주간 임종한 환자들의 명단도 같이 말씀해 주신다. 나는 그 시간엔 마음속으로 구구단을 외운다. 청각을 차단할 수 있는 나름 단순한 방법이다. 임종 명단은 뒤로 한 채, 전원 가셨거나 잠시 댁으로 퇴원했나 보다... 하고 생각해 버린다.
지각을 피하려 급하게 뛰어가면서도 백합꽃님이 있는 병실을 지날 땐 속도를 늦춘다. 병실 문 옆에 붙은 명단을 쓱 눈여겨보는데, 그날은 백합꽃님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은 브리핑 내내 구구단을 외웠다.
출근길에 보던 마음 한편에 핀 백합꽃도 이제는 없다. 그날 이후로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마음의 꽃을 심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