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 호스피스 봉사자 이야기
내가 살면서 주변 지인을 모두 초대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기억도 안 나는 나의 돌잔치. 사진으로 본 나의 첫 행사에는 많은 친척분들이 함께해 주셨었다. 매년 생일잔치를 했던 어린이 시절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인생에서 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가장 큰 행사는 결혼식과 장례식이 아닐까 싶다.
결혼하면 겪게 되는 자녀들의 백일잔치, 돌잔치도 있다. 가족들 뿐만 아니라 부모의 지인들도 많이 모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자녀가 주인공인 행사라고 생각한다.
결혼도 선택이라고 말하는 요즘, 죽음도 선택이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좋지만,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무서운 죽음을 나는 꽤 자주 생각한다.
언젠가 20대 후반에, 나는 엄마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저는 수목장으로 해주세요." 모두가 예상했듯이 파리 올림픽에 나올법한 화려한 등짝 스매싱이 날아왔다. 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 엄마는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그만하라는 반대 세력이 되었다.
여전히 난 수목장을 원한다. 나름 경제적 독립을 한 지 오래되었고, 그동안 월세를 지나 전세까지 왔다. 원룸이라 쓰고 단칸방이라 읽는 주거 형태를 꽤나 오래 했다. 주변의 많은 청년들처럼 아파트를 목표로 살아온 시간이 있다. 왠지 죽어서까지 아파트 같은 납골당에 입주하고 싶지 않았다. 무덤을 만들기엔 땅도 없거니와 흙더미 밑이 답답할 것만 같기도 했다. 바다나 강에 뿌려지자니 물 공포증이 올라오는 듯했다.(물 공포증을 극복하려고 자유형 수업에 도전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었다.) 이런 내가 참 좋아하는 게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나무.
누군가 나를 그리워하는 날엔 내가 묻힌 나무 그늘에 앉았으면 했다. 나뭇잎 사이의 하늘을 올려다 보고 바람을 느끼는 쉼이 되길 바랐다.
얼마 전 약혼자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암으로 죽고 싶어." 차마 부모님 앞에서는 꺼내지 못한 말이었다. 나의 말을 들은 약혼자는 "퉤 퉤 퉤 세 번 해."라고 했다.
"퉤, 퉤, 퉤"
결혼식을 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피력해 왔던 나였다. 이런 내가 암으로 죽겠다느니, 수목장을 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하자 약혼자는 '역시 너답다'는 반응이었다.
이렇게 우린 죽음을 이야기하는 걸 꺼린다. 나 또한 암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순간이 오지 않길 바란다. 또한 지금도 어디선가 암투병을 하고 있는 분들 옆에서는 절대,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라는 걸 안다. 다만 갑작스러운 사고사가 된다면 나의 삶을 정리하지 못한 아쉬움이 클 것 같았다. 호스피스에서 만나는 꽃님들을 보면 신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간접적 경험'이라는 단어는 오만이다. 하지만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까지 주어진 삶을 소중하게 겪어내는 과정도 많이 봐왔기에 그 무서운 말을 내뱉었던 것 같다.
최근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났다. 호스피스 병동의 사회복지사님과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관련 주제가 나왔고, 우린 서로의 말에 맞장구 쳐주었다. '내가 이상한가?'라는 물음이 커져만 갔는데,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고마웠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한 번쯤 각자 죽음의 순간을 생각해 보는 건 필요하다. 생각으로 조차 자신의 죽음과 마주하길 피하고 싶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은 겪게 될 일이다. 결국 잘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이 가는 그 길을 잘 걸어가고 있다는 게 아닐까.
한걸음 한걸음 늙어가는 나에게 마지막 행운이 주어진다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고 말하는 나이의 할머니가 된 어느 날 밤 자다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길 소망한다. 아, 그리고 (수목장으로 해주세요. 소곤소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