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챙겨본 결혼기념일이 부끄러워서 화내고야 말았다

by 미묘



요즘말로 츤데레라는 표현을 붙이기에도 조금 부족하다. 살갑지 않더라도 툭, 툭 잘해주는 걸 기대했지만 오늘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내를 간병하는 남편보다, 남편을 간병하는 아내를 더 많이 보는 것 같다. 남자와 여자의 기대수명 차이 때문일까? 그 틈에서 아흔이 가까운 아내를 간병하는 남편,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아내한테는 물론이고 봉사자들한테도 조금은 딱딱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내 눈은 할아버지를 계속 쫓았다. 병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가 하면, 할머니가 덮고 있는 환자용 이불을 만지고 또 만졌다. 할머니의 발 끝까지 온기를 담아두려는 듯 애꿎은 이불만 만지작 거리시곤 했다. 할아버지의 곁에 가면 나의 시간도 느리게 가는 듯했다. 급기야 초점 없는 멍한 눈빛이 병실 바닥에 닿을 땐, 사건의 지평선에 멈춰 선 노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긴 세월의 끝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대화할 땐 옆 자리 환자나 통합간병인, 봉사자가 출동하곤 했다. 두 분이서 한껏 목소리를 높여 대화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두 분만 유일하게 소통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깔깔 웃어 보이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들의 딸이다. 딸도 이미 환갑을 넘겼지만 백발의 부모님 앞에서는 유일하게 어린아이처럼 웃어 보였다. 그러면 굳어있던 공기가 금세 녹아 내리곤 한다. 얼어있던 병실 사람들이 '땡'하고 풀려버리는 마법이 펼쳐진다.


며칠 뒤 두 분의 결혼기념이라는 걸, 딸의 입을 통해서 들었다. 평생 그런 거 챙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딸의 핀잔에 표정하나 변하지 않던 할아버지였다. 딸이 집으로 돌아간 다음날 병실을 지키던 할아버지가 호스피스 사무실에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주토피아의 나무늘보만큼이나 느릿하지만 한 장 한 장을 꼼꼼하게 세어서 사회복지사에게 내밀었다. 잘 접힌 만 원짜리가 꼬박 서른 장이나 되었다. 그렇게 소중하게 건넨 지폐 위에 갈 곳 잃은 눈빛이 앉았다. 평생 챙겨본 적 없는 결혼기념일이니 알아서 해달라는 심플한 문장만 남긴 채, 할아버지는 병실로 돌아갔다.


떡을 맞추고 케이크와 꽃을 샀다. 딸이 오는 날에 맞춰서 결혼기념일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만큼이나 딸도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다. 호스피스의 모든 병실에 있는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 사회 복지사... 호스피스 병동을 채우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떡과 이벤트 소식이 전해졌다. 고깔을 씌워 드리고 초에 불도 붙였다. 준비한 꽃다발을 할아버지 손에 쥐어 드렸고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오다 주웠다'를 시전해 보이셨다.


병실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이 축하를 전했다. 상기된 얼굴로 어색해하던 할아버지에게 기름을 끼얹은 건 밝고 유쾌한 딸의 한마디였다. "아부지는 이렇게 하실 수 있으면서 왜 평생 그렇게 살았어요~"


딸이 당긴 방아쇠에 할아버지는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순식간에 차가워진 공기는 얼마가지 않아서 스르륵 풀렸다. 부끄러운 마음에 버럭 소리 질렀지만 금세 말을 얼버무리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 공간에 함께 있던 모두에게 귀여움으로 다가갔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챙기고 싶었던 귀한 마음도 너무나 잘 보였다. 살아온 세월이 다른 할아버지의 시대에는 이런 살가움이 참 어렵지 않을까? 비난하기보단 진짜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면 보인다. 아흔의 귀여움이. 그리고 그 속에 농밀하게 감춰져 있는 뭉근한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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