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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밥을 잘 먹는 게, 싫어

by 미묘
역설적이게도 이곳은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고,
죽고 싶다는 절망으로 시간을 채우는 사람도 있다.





오전에 주어지는 몇 시간. 내가 호스피스 환자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호스피스 자원봉사는 교육을 꼭 이수해야 할 수 있다. 교육과정에서 배운 사항은 아니지만, 10년이 넘는 봉사 시간 안에서 생긴 나만의 작은 룰이 있다.


고개를 푹 숙여 꾸벅, 감사를 표현하기

마스크를 쓴 채 환자들과 대면하다 보니 나의 표정에 한계를 느낄 때가 많다. 오래 씻지 못한 발을 마사지하거나 샴푸 거품이 잘 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 머리를 못 감은 환자도 자주 본다. 봉사자에게 맡기는 환자들의 마음이 불편할까 싶어, 다 괜찮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대하고 싶다. 마스크 위로 빼꼼히 보이는 눈으로 없는 눈웃음을 만들어 내려다보니 눈가에 주름이 가득하다. 뭐, 생길 때가 되어서 생겼겠지만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여기려고 한다. 눈가 주름 이야기는 차치하고, 표정으로 다 전하지 못하는 마음은 정수리를 훤히 보이며 꾸벅 인사하는 걸로 대신한다.


식사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기

식사뿐만 아니라 질문은 최대한 자제하고 조심스럽게 한다. 주로 환자가 하는 말이나 지난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편이다. 다양한 이슈로 금식인 환자가 많다. 환자가 먹기 힘들어해서 구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영양을 섭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환자의 의지와는 다르게 금식이 정해지곤 한다. 이런 경우에는 음식에 대한 갈망이 크다. 발마사지를 하거나 샴푸, 목욕을 하는 동안에도 먹고 싶은 음식을 말씀하실 때가 있다. 안쓰러운 마음에 어떻게든 챙겨 드리고 싶지만, 최악의 경우 음식물을 섭취하다가 사래가 걸리거나 기도로 음식이 잘못 넘어가는 경우도 있기에 의료진의 판단에 적극 따라야 한다. 오전에 시작한 봉사가 점심시간을 향해 가면 환자의 식사 시간을 피해서 봉사를 이어가기도 한다. 이럴 땐 환자에게 점심식사를 하는지 여쭤보지 않고, 보호자나 통합 간병인에게 아주 작게 여쭙곤 한다.






점심시간이 되자 환자들의 식사를 챙기느라 분주해진 병실에서 마지막 환자의 발을 마사지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딸의 얼굴에도 주름살이 가득하다. 점심을 챙기려던 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환자가 입을 열었다.


난 싫어. 죽고 싶어.


발 끝에 서있던 나는 얼른 환자의 얼굴 옆으로 갔다. 마사지 크림을 잔뜩 바른 손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나를 보던 눈이 천장을 향했고, 이내 공허해진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가족들은 내가 밥 잘 먹어서 좋다는데, 이 병실에서 나만 밥 먹는다고 다른 보호자들도 부러워하는데... 난 싫어, 죽고 싶어."


호스피스에서의 시간이 제법 쌓였지만 여전히 나는 어리숙하다. 이럴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가만히 손을 잡고, 잡았던 손을 쓸어내릴 뿐이다. 한 번, 두 번...


나의 손을 꼭 잡은 할아버지가 말했다. "집에 갈래. 마누라 보고 싶어."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환자에 대한 기본 정보를 숙지한 채 봉사를 하는 특성상, 환자의 아내에 대한 소식을 들었었다. 자녀들은 쉬쉬하고 있지만 이 환자의 아내는 몇 달 전 세상을 떠났다. 말기암과 싸우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사이에 아내에게도 암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아내의 암은 속도가 더 빨랐다. 남편을 보러 오는 간격이 길어졌고 어느 날부터는 남편을 보러 오지 못했다.


아내가 왜 오지 않냐는 원망의 말 대신, 집에 가고 싶다는 말. 그리고 아내가 보고 싶다는 말... 밥 잘 먹고 있는 자신이 싫었던 건, 어쩌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게 아닐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그 무엇도 하기 싫은 무기력함. 늘 따뜻했던 병실이 오늘은 새파랗게 차가웠다.


그저 오늘 밤 평안하기를, 꿈에서라도 보고 싶던 아내를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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