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흔살 어른이 Oct 23. 2019

6화. 열지 않은 택배 박스

일본인 아내와 사는 한국 남자의 진솔한 이야기

얼마 전 운동을 하다 허리를 다쳐 일주일에 두세 번은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는다. 퇴근하면 집에서 온찜질을 하고 스트레칭을 하곤 한다. 허리 통증이 오래가는 나를 안쓰럽게 생각한 아내는 고맙게도 인터넷에서 마사지볼과 허리 안마기를 내 이름으로 주문해 줬다.


며칠 뒤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허리 안마기와 마사지볼이 도착했단 택배 아저씨의 반가운 문자가 왔다. 그 날은 저녁 약속이 있어 밤 12시가 다 돼서야 집에 돌아왔고 아내와 딸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내 방 앞에 안마기와 마사지볼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안마기는 아내의 워너비 아이템 중 하나라 먼저 사용해볼 만도 한데 내가 포장을 뜯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게다.


다음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며 아내에게 "안마기 먼저 써보지?"라고 하자 아내는 "내 거 아니잖아"라고 했다.

금 생각해 보면 내 이름이 적힌 택배와 우편은 항상 뜯기지 않은 채 고스란히 놓여있곤 다. 교통 신호 위반 범칙금 고지서와 같이 엄청난 궁금증을 자아내는 우편일지라도 내가 퇴근하고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빨리 뜯어보라고 내게 봉투 건다.


부부 사이에 너무 '네 것 내 것' 따지는 거 아냐?라고 할 수 있긴 하지만 아내의 말을 들어보면 일본 사람은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네 것 내 것'은 철저히 구분한다고 한다.


학창 시절 한국 학생들과 같이 공부했던 일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의도치 않았던 한국 학생들의 행동 때문에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인이 친한 한국 학생과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를 하는데, 한국 학생이 "이 지우개 좀 쓸게~"라고 말을 하며 지우개를 빌려갔다고 한다. 여기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다면 한국 사람, 이상한 점을 느꼈다면 일본 사람일 것이다. 한국 사람 대부분은 친한 친구라 여기면 지우개 쓸게란 말을 하며 이미 지우개를 손에 쥐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보통의 일본 사람이라면 " 지우개 좀 써도 될까?"라고 물어보고 주인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기다린다. 이외에도 한국 학생과 홈셰어를 했던 한 일본인 친구는 냉장고에 둔 치즈 한 조각을 허락도 없이 먹은 한국 친구 때문에 맘이 상한 적이 있었다고도 한다. 비록 직접 말은 못 했지만..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신혼초, 퇴근길에 맛있는 빵을 사 온 적이 있었다. 다 먹지 못한 빵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다음날 출근을 했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내용은 "이 빵 먹어도 돼?"였다. 나는 '빵 하나 갖고 지금 나랑 네 것 내 것 따지자는 건가?'라고 서운해하며 "뭘 그런 걸 물어봐? 그냥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 이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몇 번 있긴 했지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한다.


친분이 쌓이면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한국 사람. 친분이 쌓이더라도 네 것과 내것은 확실히 구분한다는 일본 사람.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문화는 아닌 듯하다.


이전 06화 5화. 김치와 기무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