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 낙천적으로 생각하기
나는 어떤 위기상황이나 힘든 상황에서도 생각보다 낙천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예민하게 보인다는 첫인상과 달리 주변 사람들이 가장 놀라는 부분 중에 하나다. 이러한 성격이 언제부터 형성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릴 적 일화를 생각하니 그때부터 그랬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생 때, 여자 아이들 고무줄놀이할 때 가위로 자르고 도망가거나 괜스레 옆에서 놀리고 빵을 먹고 있으면 뺏어먹는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반에도 역시나 장난꾸러기가 존재했는데, 한 날은 내가 착용했던 보청기가 좋은 표적이었나 보다. 1학년 때 나는 착용한 보청기가 워낙 커 보일 정도로 마르고 체구가 작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보청기가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가 내 보청기를 뺏고, 도망간 적이 있었는데, 남자아이라 뛰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따라잡기 힘들었지만 죽을힘을 다해 뛰어간 적 있다.
연년생 오빠와 레슬링 한 경험을 바탕 삼아, “야! 내 보청기 내놔! 죽을래?” 라며 그 친구를 잡으며, 대성통곡을 한 적 있다. 튀는 것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그때 왜 복도에서 소리를 질렀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내게 보청기는 신체 일부였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 친구는 당황함을 드러내며 사과를 했고 평소에 내가 착용하는 보청기가 궁금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보청기가 흔하지 않았을 때라 많이 궁금했나 보다.
나는 그 친구에게 “진작 말하지. 궁금했으면 내가 보청기 껴보게 했을 거 아냐! 뭐하러 갖고 튀어가는데 !”라고 했다. 그 친구는 머쓱해하며, “아 사실..보청기가 궁금해서”라고 해서 나는 보청기를 궁금해하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보청기 체험을 하게 했다. 나는 “한번 껴봐. 크게 들리제?”라는 낙천적인 말을 건네며 착용하게 허락해주었다. 물론 그 친구들은 비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보청기를 착용하면 크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소리가 너무 커서 놀라서 운 친구도 있었고, 반면에 신기해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다름을 인정하고 보청기 이야기로 교감하다 보니 어느덧 친해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고 그 짓궂은 장난꾸러기와도 아직까지 친구의 연을 이어오고 있다.
어릴 적 오빠는 장난치는 친구들 때문에 속상해하던 나를 보고 “그냥 한대 쥐어박아버려, 무시해”라고 쿨하게 얘기해줬던 기억이 난다. 나이 들어 돌이켜보니 별 일 아닌 일은 낙천적으로 넘길 줄 알라는 의미가 담겨있지 않았나 싶다. 살다 보면 남들과 다르다는 것 때문에 누군가의 이목을 끌기 쉽다. 성인이 되고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친해지는 것에 대한 장애요소로 작용하기도 하며 그러한 점 때문에 알게 모르게 거리를 둘 수 있다. 하지만 어릴 적 내가 순수하게 친구들에게 건넸던 보청기처럼 낙천적인 태도로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쿨하게 인정할 수 있다면 살아가는데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