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 1주기를 맞아서
花非花, 霧非霧,
화비화 무비무
꽃이면서 꽃이 아니요 안개이면서 안개가 아니어라.
夜半來, 天明去.
야반래 천명거
깊은 밤 찾아와 날이 밝으면 떠나가네.
來如春夢幾多時,
내여춘몽기다시
올 때는 봄 꿈처럼 잠시 왔다가
去似朝雲無覓處.
거사조운무멱처
떠날 때는 아침구름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네.
- 花非花(화비화) : 꽃이면서 꽃이 아니어라 - 백거이(白居易,772∼846)
https://youtu.be/GH71bBYOU9Q?si=XVT0uj0NodkUrpJ8
산수유는 만개하고, 벚꽃과 개나리도 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꽃들이 왔고, 그렇게 봄이 오고 있네요.
오늘은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고한 지 1년 된 날입니다. 천상병시인이 귀천에서 말한 것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끝내고 꽃피는 봄에 하늘로 돌아간 류이치 사카모토. 그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A flower is not a flower, Flower 곡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백거이의 시에 영감을 받아서 A flower is not a flower라는 곡을 작곡했어요. 시에서 말한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채울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을 시와 음악으로 담은 것이죠. 원래는 대만 얼후(중국악기) 연주자인 케니 웬(Kenny Wen, 溫金龍)이 의뢰하여 1996년도에 발표한 곡입니다. 이 외에도, 사카모토의 여러 앨범에 다른 편곡으로 실려 있는데요. 저는 UTAU에 실린 버전이 제일 맘에 드는군요.
<UTAU> 이 앨범을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듣게 된 「a life 」라는 곡을 통해서였습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간결하고도 명랑한 피아노 리듬, 거기에 순수하고 맑으면서도 묵직한 힘이 있는 목소리가 꽤 매력 있게 다가왔어요. 가창력을 뽐내기보다 담백하게 말하듯 가사에 진심을 담은 나긋한 목소리.. 앨범사진 속 류이치 사카모토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그 옆에 서 있는 한 사람. 바로, 오누키 다에코(Taeko Onuki, 大貫妙子)입니다.
' 오누키 다에코는 일본의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로 시티팝 장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을 시도하며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그녀의 음악은 신비로운 분위기와 독특한 멜로디로 가득 차 있으며, 그녀의 예술적 탐구와 음악적 열정이 담겨 있다. 그녀는 일본의 뮤직씬에서 독특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 japan wiki
https://youtu.be/NSIcABoTkvk?si=l8zCqzsdo3JobOg9
이 곡은 이 앨범에서 발표한 신곡입니다. UTAU 앨범엔 잔잔하고 촉촉한 곡이 많으니 신곡은 경쾌하고 세련된 면을 돋보이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노래를 들어보면 그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전 이 곡을 통해 UTAU앨범을 만났고, 그 안에서 Flower, Flower is not a flower 두 곡을 연이어 만나게 되었어요. 쓸쓸하고 멜랑콜리한 감성에 매료되었다고 할까요. 노래와 피아노만으로도 충만했습니다. 가장 최소한의 것으로 가장 많은 것을 말하며 끝없는 공간을 붙드는 류이치 사카모토인데, 거기에 순수한 목소리가 더해졌으니까요. 멀리서 나직하게 또 소담하게 울리는 피아노도 인상적입니다. 튀지 않게 스며들도록 스테레오감을 조절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전면에 더 확연히 드러날 수 있게 했어요.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 앨범에 대해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단 두 사람의 노래와 피아노라는, 더 이상 단순한 것은 없을 정도의 편성이다. 노래도 피아노도 어디에도 숨길 수 없는 벌거벗은 모습이다. “라고요.
그렇습니다. 음악의 편성이 단순할수록, 템포가 빠른 곡보다 느린 곡일수록, 소리는 숨김없이 더 잘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이 분명히 있는데, 자기의 음악적인 주관이 확실하다면 이 두 분처럼 아름다운 하모니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그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내 한계를 직면하고 경계를 인식하면 그다음 단계가 보이지만, 노력해도 잘 되지 않을 땐 자신감을 잃기도 하니까요. 오늘 파울 첼란의 전집을 읽던 도중 어느 한 구절이 다가왔습니다. 봄에 불어서 더 매섭고 날카로운 찬바람처럼 말이죠. " 너를 미루지 말라, 그대여. "
<UTAU> 앨범은 두 사람의 협업 프로젝트
이 앨범은 2009년 상반기에 오누키 다에코가 직접 류이치 사카모토에게 협업을 의뢰하여 진행하게 된 프로젝트입니다. 기존 류이치 사카모토의 곡을 기반으로 그녀가 직접 작사도 하고 시를 붙이기도 했어요. 총 2장이 수록되어 있고 CD2에는 노래를 제외한 피아노 연주곡만으로 담겨 있습니다. 피아노 연주만 담긴 두 번째 앨범은 유독 그의 다른 피아노 솔로 앨범보다도 제 취향에 더 잘 맞습니다. (글을 쓰며 koko, aqua도 듣는 중인데 늘 좋네요.)
사카모토는 원래 이 곡을 얼후의 울림을 생각하며 작곡했는데, 음의 간격이 큰 곡이라 피아노로 연주할 때엔 잔향이 남아 있어 좋지만, 노래로 표현하면 군데군데 뚝뚝 끊어지는 소리의 빈틈이 신경 쓰였다고 합니다.
오누키 다에코는 이 곡에 Flower란 이름을 붙이고 작사를 하면서
자연 속에서 피는 꽃,
관상용으로 집에서 피는 꽃,
물을 주지 못해 시들어버리는 꽃,
들판에 피는 꽃,
모두 아름다운 생명이며, 그 운명의 대비를 < Flower >라는 상징에 담아 썼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담은 그녀의 가사를 한 번 볼까요?
< Flower >
く夜露に濡れ その葉をたたむ
幼い頃の 姿で眠る
花は目覚め 月を仰ぐ
名はネムノキ 夏の夜の
満ちては欠けてゆく
星霜の果て
なくしたのだろうか
ソロモンの指輪を
光と闇がつくるモザイク
もっと沢山の歌詞は
忘れられた 部屋の片隅
太陽さえも とどかぬまま
私は光に からだを向ける
つつまれながら 渇いてゆく
밤이슬에 젖어 그 잎사귀를 접고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잠든다
꽃은 깨어나 달을 바라본다
이름은 느티나무 여름밤의
차고 넘치면 사라져 간다
별똥별의 끝
잃어버린 것일까
솔로몬의 반지를
빛과 어둠이 만드는 모자이크
더 많은 가사는
잊혀진 방 한구석
태양마저도 가만히 있는 그대로
나는 빛을 향해 몸을 돌려
에워싸며 말라간다
https://youtu.be/I14ejAHJwJI?si=m3CKCZsmoerW-HJ9
움켜쥘수록 사라지고, 채우고 싶은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애잔하게 흐릅니다. 그리움과 쓸쓸함이 적막하게 담겨 있는데, 이 정서는 백거이 화비화의 시와 그 결을 같이 하고 있지만, 그녀가 쓴 가사에서 더 세차게 굽이치고 있습니다.
작년에 발간된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전기,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서 그는 그녀를 이렇게 추억하고 있어요.
“ 삿포로 교외에 있는 예술의 숲 스튜디오에서 오랜만에 합숙을 하며 녹음 작업을 했죠. 앨범을 같이 만들자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해왔지만 제 일정이 바쁘기도 했고, 예전에 비해 서로의 음악 스타일이 너무 동떨어진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는 등의 이유로 도망쳐왔습니다. 하지만 환갑을 앞두고 한 번은 해봐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죠. 젊었을 때 오누키 씨에게 여러 모로 도움을 받았는데 정작 저는 폐만 끼친 것 같아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짐승처럼 살던 저도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사람이 됐으니까요. “
이어, 젊은 시절 한 때 그녀와 연인사이였고 본인의 변심으로 그녀를 떠났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긴 시간이 흘러 이제는 친척 같은 사이가 되었고 <UTAU>를 통해 어른이 된 뮤지션 동료로서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 낸 것 같다면서요. 다른 인터뷰에선 이런 말을 하기도 했어요. “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오누키에게 (이 앨범 작업으로) 마지막 봉사하는 느낌입니다. 옛날에 여러 가지로 고생했으니까요. “ 마음의 빚이 작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죠. 오누키 다에코는 이 작업 후 어떤 생각을 했을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젊고 가진 것 없던 힘겨운 무명시절. 그 시절에 음악과 함께 보낸 인연들을 떠올리면 그리움이 몰려온다고 말합니다. 시간을 아우르며 서로를 격려하고 견디기도 하면서 오랜 세월 안에서 켜켜이 쌓여간 우정. 그녀의 멋진 제안 덕분에, 또 그 마음을 지나치지 않은 그 덕분에 이 앨범이 탄생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백거이의 花非花(화비화), Flower, 그리고 A flower is not a flower. 어째 봄이지만, 꽃을 노래하지만, 그들의 노래엔 봄도 꽃도 부재로 그리웁게 흐릅니다. 이 곡들이 전해 준 그 마음들을 받아 정지용의 시 한 편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네요. 그 시를 공유하며 류이치 사카모토 1주기를 맞아 올리는 <시와 음악> 글을 여기서 마칩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1>
함께 보면 좋을 류이치 사카모토에 대한 글들을 공유드립니다.
https://brunch.co.kr/@minachoi/26
https://brunch.co.kr/@minachoi/21
https://brunch.co.kr/@minachoi/36
https://brunch.co.kr/@minachoi/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