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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을 그립니다 미내 Sep 21. 2023

양과 질의 이야기

<시선> 15.2x20.3cm_ sharppencil & watercolor on paper_ 2023_ 윤미내


‘양보다 질’이라는 말이 있다. 개수보다 품질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좋은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실험이 필요하고, 결국 충분한 양의 과정이 있어야 질적으로 우수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양보다 질’이라는 말은, 그동안 얼마나 양을 하대하고 있었던가. ‘질’은 ‘양’에게 조금은 미안해하고,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양과 질의 동급대우를 주장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양과 질의 조화로운 균형이 필요하다. 어쩌다 운이 좋은 이에게 적당한 노력으로 주어진 자질은 거만함을 안겨 줄 터이고, 제자리걸음인 일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이는 성취감에 목말라 있을 것이다. 서로의 힘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얼마나 고르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은 좌우된다.




글을 쓰는 것도 양과 질의 균형을 지탱하는 일이다.

양의 이야기

아이들이 블록을 가지고 노는 장면을 보면, 그것이 집이 되고, 성이 되고, 도시가 되어가는 과정을 감상할 수 있다. 한두 개의 블록으로는 어림없는 이 놀이는, 블록을 쌓고 또 쌓아 올리는 것이 놀이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블록을 잡았을 때는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막연한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에 굴복하지 않고, 블록을 쌓고 올리는 일에 시선과 시간을 아끼지 않은 아이 앞에는 한 세계가 펼쳐져 있다.

블록을 쌓는 것처럼 글을 쌓아가는 일은 중요하다. 성실히 쓰는 행위 후에는 정성스럽고 참된 글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책을 읽는 도중에 기꺼이 형광펜을 꺼내어 밑줄을 긋고, 책의 모서리를 살짝 접어놓는, 번거로운 일을 하게끔 만드는 문장은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파도 속에서 서핑하기에 적합한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처럼, 백사장으로 끊임없이 이는 물결을 묵묵히 지켜낸 시간과 비례한다.


질의 이야기

같은 대본을 주어도 그 역할을 잘 표현해서 배역을 따내는 배우가 있다. 그들은 적절한 곳에서 안단테와 알레그로를 연주한다. 대본을 소신껏 해석하고 개성을 담아 표현할 줄 안다. 이런 배우의 연기는 특별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글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닿는 글에는 수없이 문장을 손질했을 글쓴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 단어를 문장에 들이기 위해 여러 단어를 수집하는 행보와, 나열된 단어를 한 개씩 문장에 넣고 읽는 음성이 느껴진다. 불필요한 표현은 없는지, 혹시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다른 가치를 향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자신에게 솔직했는지 검열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글의 시작과 멈춰야 하는 순간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한다. 그대로의 나를 보여도 타인에게 불편하지 않은 온기의 글은, 보잘것없을지 모를 자신의 이야기를 수없이 확인했을 과정의 성과다.



글을 쓴다는 건 현실과 분리된 기분을 견디며, 그럼에도 쓰는 행로를 멈추지 않는 일이다. 혼자만의 절대적인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 글쓰기의 조건은 때론 상황을 고립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외롭고 허망한 마음과 자주 닿는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겹겹이 쌓여갈 때 넉넉하게 채워져 있는 서랍 안의 글과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충실했던 그 고독의 밀도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따뜻한 글이 되어 돌아올지 모른다.


삶도 글을 쓰는 것처럼 양과 질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양을 늘리는 방법을 배워야 완성도 있는 결과의 환대를 누릴 수 있다. 두드렸다면 한 번 더 두드리고, 걷고 있다면 한 걸음 더 내딛기를 바란다. 그 노력이 익숙해지는 순간, 외롭고 허망했던 마음을 집어삼키는 빛을 맞이할 것이다. 도전과 시도의 경험을 늘려갈 때 우리에게 더 가치 있는 일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모든 이미지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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