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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을 그립니다 미내 Nov 15. 2022

크레파스와 유토피아

<Ayoon's room> 41x35.5 cm_ sharppencil on paper_ 2017_ 윤미내


유년 시절 중, 결혼 안 한 세 명의 삼촌과 함께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할머니까지 포함하여 어마어마한 대가족의 살림을 맡아하신 엄마는 당시 너무 힘드셨겠지만, 나는 그때의 추억이 유년 시절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조카 바보 삼촌들의 사랑으로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개성이 각기 다른 삼촌들과의 놀이는 즐거웠고, 퇴근길에 한두 개씩 사다 준 장난감과 학용품은 언제나 차고 넘쳤다.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만난 첫 짝꿍은 몽당 크레파스를 들고 다녔다. 며칠을 지켜보아도 같은 크레파스를 들고 다니기에, 집에 있는 새 크레파스를 가져와 친구에게 주었다. 집에는 비닐을 뜯지도 않은 48색, 72색 크레파스가 여러 개 있었고, 그림을 아주 열심히 그려도 크레파스를 모두 사용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짝꿍은 조용한 친구였는데 고맙다고 미소 지어주었고 그 이후로 우리는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 월요일 학교 조회 시간이었다. 교실 스피커를 통해 내 이름이 불려져 방송실로 갔는데, 교장 선생님께서 표창장이라는 상을 주셨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엄마께 상장을 보이며 ‘표창장’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다. 엄마는 담임 선생님과의 통화 후에 내가 친구에게 크레파스를 주는 선행을 베풀어 상을 받은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스웨덴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한 집에 세 명의 청년이 살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이 큰 회사 정규직으로 채용되는 내용이 나왔다. 축하 파티를 하는 중에 친구 한 명이 “이제 돈도 잘 벌게 되었으니 삼등분했던 월세에서 네가 좀 더 많이 내”라며 말을 건넸다. 그리고 정규직이 된 청년은 망설임 하나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공평하게 1/n으로 나누는 관습이 몸에 밴 나로서는 이 상황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본인의 노력으로 정규직이 된 것인데, 그것이 다른 친구를 위해 자연스럽게 베풂으로 순환되는 것이 놀라워서였다. 이 장면은 드라마의 흐름으로는 큰 의미를 둘 만한 부분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신선한 자극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인간의 유토피아는 각자의 이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기에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단정 짓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각자가 추구하는 사회적 이념이 잘 다스려지지 못한다면 국가는 혼란과 파멸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이념을 지켜내면서 공존할 수 있다면 이것만큼 완전한 국가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다. 조금 더 가진 자들이 조금 덜 가진 이들과 나누는 것이 순환되는 사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회, 이것이 더 가진 이들에게 억울함이 되지 않는 사회.


어릴 적 짝꿍과 나누었던 크레파스의 일화는 가끔 떠오르는 추억이다. 내가 가진 크레파스 중에 친구에게 나누어준 크레파스 하나가 없어도 행복했고, 짝꿍 또한 새 크레파스로 함께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했다. 어릴 적 이 마음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아닐 터. 어떠한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인간다움의 본질에 귀 기울이는 그런 세상을 꿈꿔본다.



※모든 이미지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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