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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달 Oct 27. 2021

아빠가 앞치마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은퇴한 아빠가 요리를 하기까지

얼마전에 썼던 글 “엄마는 왜 매일 밥,밥,밥 할까” 말미에 들깨소고기미역국을 끓여 부모님께 드릴 거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렇게 소고기, 미역, 들깨 팍팍 넣은 미역국을 부모님께 드렸는데 생각지도 않은 마음이 되돌아왔다. 아빠가 미역국 맛있게 잘 먹었다며, 나에게 선물이라고 내민 봉지 속에는 아빠가 손질하고 부쳤다는 연근과 단호박이 든 통이 있었다. 이거 손질하고 굽느라 40분이 걸렸다며 아이처럼 웃는 아빠의 모습에 왠지 마음이 일렁거렸다.



일반 회사에 다니다 은퇴하신지 꽤 되신 우리 아빠. 은퇴하고 처음엔 주방 근처에도 안 오시던 분이 슬슬 영역을 확장하시더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앞치마를 입고 설거지를 도맡아 하신다. 요리는 엄마의 독보적인 영역이라 생각해서 설거지, 청소를 주로 하시던 아빠가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요즘은 요리도 익숙해지셨다. 엄마가 요리를 할 때 뒷전에서 살펴보신 경력이 쌓이다 보니, 재료 손질부터 양념, 불조절까지 이제는 꽤 능숙해진 것이다.      


아빠가 처음부터 가정적인 분은 아니었다. 나의 유년시절을 돌이켜보면 아빠는 항상 바쁘셨다. 평일에는 매일 야근이 기본이었고, 주말에 출근하는 일도 태반이었다. 24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중남미 출장을 다녀오셔서도 공항에서 바로 회사로 출근하는 분이었기에, 집에서 아빠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는 이해를 하면서도, “내가 평생 너희 아빠를 기다린다” 며 불평을 토로하시곤 했다. 아빠가 장교로 군생활 하던 4년 동안 기다린 엄마인데, 그렇게 결혼을 하고도 매일 아빠를 기다린다며.      


그렇게, 회사에 몸 바쳐 일하시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은퇴를 하게 되었다. 아빠의 의지와는 무관한 시기에, 본인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방법으로 결정되었기에 아빠는 한동안 힘들어하셨다. 매일 일하러 갈 곳이 없어졌다는 사실보다도, 더 일 할 수 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데 라는 마음을 내려 놓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아빠는 그 동안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으시고, 친구도 만나시고, 운동도 하며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하셨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 마음이 많이 편안해진 아빠는 자연스레 앞치마를 입기 시작하셨다.  


그런 아빠를 보는 엄마는 어떤가 하면, 집안일을 아빠가 도와주니 고마워하긴 하면서도 동시에 본인 영역에 대한 잔소리가 침투하니 괴로워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엄마 허리가 안 좋아지면서 아빠가 너무 많은 집안일을 떠맡게 된 것을 미안해하신다. 밥,밥,밥 하시는 분이라, 아빠가 좋아하는 뜨끈한 국에 반찬 몇 개는 항상 준비하려 하시는데 그것조차 못하게 될까봐 마음이 쓰이시는 듯하다.      




아마도 아빠와 엄마는 노년의 퍼즐판을 맞추고 계신지 모른다. 두 분이 함께 살면서 역할 분담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보며, 두 분만의 퍼즐을 만들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퍼즐의 모나있는 어떤 귀퉁이는 둥글게 공글려보고, 너무 비어있는 부분은 서로 채워가며 만들고 있는 퍼즐판 말이다. 한때는 회사라는 거대한 퍼즐판을 이리저리 맞추던 아빠가, 은퇴 후 집에 돌아와 새로운 퍼즐판을 받아 맞추고 계신다. 손에 익지 않는 청소기를 작동시켜보고, 서툰 솜씨로 설거지를 하던 아빠가, 이제는 자연스레 앞치마를 하고 단호박과 연근을 손질해서 구우신다. 그 퍼즐조차 최선을 다해, 마음을 다해 맞추고 계시는 아빠를 존경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아, 아빠가 준 연근, 단호박 구이의 맛은 어땠냐면. 아삭아삭하면서도 포슬포슬해서 너무 맛있었다. 남들에겐 별거 아닌, 요리라고 하기도 힘든 음식일 수 있지만, 이 한 접시가 나오기까지 아빠의 마음을 알기에 나에겐 특별했다. 그리고 아빠의 사랑이 담긴 퍼즐 한 조각을 맛볼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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