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사원일 때 과장, 대리님들은 꼭 이런 제안을 했다. 그때의 나로 말하자면, 굳이 회사에서의 인연을 회사 밖으로 끌고 나오고 싶지 않았고, 회사가 조금이라도 내 영역을 넘어올까봐 회사와 내 생활 사이에 굵고 선명한 선을 여러 차례 그어댔던 개인주의자였던 지라, 나의 대답은 거의 No였다. 거의 15년 전 이야기이니, 그 당시 회사 분위기는 당당하게 No라고 대답하기가 쉽진 않았음에도 나는 공식적인 회식 자리만 참석하는 편이었다. 물론 술자리는 좋아했지만 위계가 없는 사람들과의 편안한 술자리만 가지곤 했다.
그러던 내가 노동주의 개념을 몸소 느끼게 된 것은 아이들을 키우면서부터이다. 비로소, 왜 그때 과장, 대리님들이 술 한잔을 곁들이며 회포를 풀고자 했는지, 왜 농사일하는 어르신들이 새참에 막걸리를 필수로 챙기셨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이라는 귀한 작물을 거두기 위해 파종하고,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는 과정들을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탈곡기에 탈탈탈 털린 것 마냥 몸은 축축 쳐지고 기운은 쭉 빠질 때가 있다. 그때 내 목을 축이는 알콜은 잠시나마 내 몸의 기운을 불어넣어주고 지친 기운을 달래주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육아 노동주는 육퇴 후 혼자 마시거나, 반주 형식으로 밥상에서 함께 술을 곁들이거나, 육아 동지들과 함께 마시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육퇴 후 육아 전쟁에서 살아남아 혼자만의 세계로 돌아온 엄마는 여기저기 파헤쳐진 몸과 마음을 술 한잔으로 달래본다. 치워도 끝이 없는 집안일과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치운 나에게 주는 한잔의 위로. 그럴 땐 고독을 안주로 택하는 편이 낫다. 어차피 남편은 사람 만나는 일이 많아서 밖에서 술자리를 갖고 들어오다 보니 내가 마실 땐 마시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이 취하면, 한 사람은 늘 맨정신이곤 한다. 둘 다 취해야 말이 통하는건데…그래서 우리가 말이 안통하는거였나;;)
밥상에 술 한잔을 곁들여 마시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도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려는 목적은 같다. 다만 이 경우 아이들이 잘 때까지 육아를 해야 하므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에 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주를 먹고 나면 뾰족뾰족했던 감각이 조금은 누그러지며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도, 여기저기 널브러진 장난감도 덜 거슬려서 눈감게 되는 효과가 있다. 분명 까칠하던 엄마가 갑자기 너그러워지고 잔소리도 확연히 줄어드는 매직이라니!
마지막은, 아이 친구 엄마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이다. 아이라는 매개로 맺어진 인연이다보니 항상 중간에 놓여있는 아이를 염두에 두다보니 보이지 않는 벽에 툭툭 부딪히던 관계가, 짠 하며 술잔을 부딪히는 순간들이 쌓이고 취기가 오르다보면 어느 순간 그 벽이 허물어지며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마법이 펼쳐지곤 한다.
코로나로 인해, 요즘은 혼술 아니면 반주만 하게 된다. 그마저도 나이가 들어 술이 몸에 안받다보니 저절로 빈도와 양이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육아는 어렵고 외로워서 똘똘똘똘 세상 청량한 술 따르는 소리에 기대곤한다. 세상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였다가 한순간에 화를 토해내는 포악한 엄마라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을 매일같이 경험하는 일이니까.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임을 매일 확인하게 되는 일이니까.
아마도, 술 한잔 하자고 했던 대리, 과장님의 마음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기계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을 꾸역꾸역 해치운 스스로가 견디기 힘들어서. 술 한잔에 일부러 제정신이 아님을 택하며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과 지금의 자신의 간극을 메우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한잔 하고 갈까?” 라고 물어봐준다면, “네, 한잔 해요” 라고 선선히 말할 수 있다. 술이 흥겹고 즐거워서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때 함께 마시지 못한 술과, 함께 토해내지 못한 감정를 위해 건배. 앞으로는 즐거운 술자리만 있길 바라며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