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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미 Oct 01. 2021

오늘 퇴사했어요.

퇴사한 날 밤에 쓰는 일기

퇴사 디데이.


마지막 업무일이지만 보통의 날이다. 평소처럼 아침 6시 30분쯤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였다. 아침거리로 시리얼과 우유를 사다 두고 작은 아이 유치원 가방을 챙겨두고 맥북 가방을 챙겨 방에서 나온다.


자기야, 나 갔다 올게. 얘들아 엄마 다녀올게~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들은 잠결에 웅얼대듯 인사를 건네고, 남편은 현관까지 나와서 잘 다녀오라며 안아준다. 마지막 출근길, 마지막 무료 음료 쿠폰을 사용하기 위해 커피빈에 들렀다. 크로크 무슈, 바나나, 아이스 아메리카노(L)를 사서 사무실에 도착했다. 크로크 무슈 한 조각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아침을 먹고, 인수인계 문서를 마저 정리하고 있자니 개발팀 신입사원 한 명이 출근과 동시에 나에게 와서 인사를 건넸다.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혹시 빵 좀 드실래요?
오, OO 씨 안녕하세요~ 어머 저 아침에 빵 먹어서 괜찮아요. 고마워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분은 빵 봉지를 들고 주저주저 서 있었다. 뭔가 놓쳤나 싶어서 되물었다.


음, 무슨 빵이에요??
아~ 이거 마늘빵인데요, 맛있대요. (빵 봉지채 내밀며) 매니저님 드세요!
어? 이거 다요?? 나 주는 거예요??
네~ 헤헤.. 나눠 드세요.
어머..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


퇴사 날 아침에 받은 선물인 마늘빵은 상도동에 있는 <블랑제리 가마> 빵집의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였다. 출근길에 빵 냄새에 이끌려 사 왔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내게 주기 위해서 일부러 들러서 골라온 빵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예쁘고 귀여울 수가! :-) 이미 크로크 무슈를 먹어서 배는 찼지만, 이런 선물은 맛있게 먹어주는 것이 예의 아니겠는가. 선물을 준 사람도 불러서 이른 시각 출근한 네 명이서 맛있게 나눠먹었다.


인수인계 문서 정리를 한 뒤 퇴직 인사 메일을 보냈다. 이제 아이맥 초기화를 위해 데이터 백업을 할 차례. 이건 시간이 좀 걸린다고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많이 걸린다. 무려 4시간. 흠... 일단 점심부터 먹고 오자.

회사에서의 마지막 점심은 부서 회식으로 청담동에 있는 일식 요리 전문점 <긴자>에서 먹었다.


청담 긴자, 특선 런치 - (왼쪽부터) 전채요리, 모듬회와 초밥
청담 긴자, 특선 런치 - (왼쪽부터) 볼락 튀김, 알밥, 대구지리탕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고 한 입 한 입 먹으며 '맛있다'를 연발했다. 코스 요리라 음식과 음식 사이에 여백이 생기는데 이는 최근 맛있게 먹은 술 이야기, 남편이 속초에 연고는 없어도 설악산을 매 년 갔다는 이야기, 어디 시골 깡촌인 줄 알았는데 속초가 제법 살기 좋은 소도시더라는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채웠다. 어느새 배도 그득그득 채워졌다.



사무실로 돌아와 오전에 하던 백업과 맥 OS 초기화를 이어서 진행했다. 허나 나의 생각보다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바람에 오후 3시 퇴근을 못하고 데이터 백업도 마치지 못했는데 벌써 4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 마이 갓...!!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무엇보다 허튼짓을 너무 많이 해서 시간이 더 지체됐다. 나의 불찰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꾸역꾸역 백업을 마치고 초기화를 진행하며 동료들의 소소한 요청 작업을 처리하고 있는데, 개발팀 직원 한 분이 내게 다가와 종이봉투 꾸러미를 내밀었다.


저.. 매니저님 이거.
어?? 이게 뭐예요??
아니 그냥.. 선물이에요.
어머, 뭐 이런 걸 다. 고마워요 ^^


그리고 이어서 내 옆자리에 앉는, 나처럼 홀로 마케터 일을 해야 하는 짝꿍 J 씨가 종이백 하나를 건네주었다.


매니저님, 이것도..
으에? 아니 이 사람들 정말... 고마워요~ :-)
별거 아녜요. 그냥.. ㅎㅎ
아휴.. 진짜 고마워요! :)


그렇게 선물을 건네받고 열어볼 틈도 없이 나의 개인정보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새로 올 사람이 정돈된 환경에서 업무를 시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아이맥 초기화에 집중했다. 드디어 초기화를 마치고, 내 외장하드에 백업한 데이터를 회사 아이맥으로 옮기는 작업만이 남은 상태였다. 헌데 시간은 벌써 6시가 다 되어간다. 결국 데이터는 회사 나스 서버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서버 담당자에게 미리 말을 건네고, 사람들과 후루룩 인사를 나눈 뒤 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하니 7시 40분. 불편한 자리에 꼬이는 업무(백업과 초기화)에 지쳐버린 나는 기진맥진해서 저녁을 차릴 기운도 없었다. 그러니 오늘 저녁은 송이네 떡볶이로 결정! 큰 아이가 아빠와 약속 후 기다렸다는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도 배달을 시키고 나는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워매 기운 빠지는 것.


힘든 몸을 일으켜서 저녁을 겨우 먹고 받은 선물을 풀어보았다. 하나는 커피빈 바닐라라테, 또 하나는 스타벅스 머그컵과 애정이 듬뿍 담긴 쪽지. 바닐라라테를 선물한 사람은 평소 달달 커피를 즐기는 분이고, 머그잔을 선물한 사람은 평소 나와 일상적인 대화를 자주 나누는 분이다.

퇴사 선물로 받은 '커피빈 바닐라라테' 그리고 '스타벅스 머그'


각자의 취향을 드러내는 선물이 고맙고 예뻐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이내 머그잔을 선물한 분이 남긴 쪽지에 마음이 뭉클하여 눈물이 그렁해졌다.


퇴사 선물과 감동의 메시지


나의 부재로 인해 누구보다 힘들 사람이 이런 메시지를 써주다니. 행복하고 기쁘고 또 행복하다. 정신없던 하루가 지나고 숨을 좀 돌리고 나니 이렇게 뒤늦은 감동이 밀려온다. 호들갑 떨며 아쉬워하기엔 내가 너무 울컥할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떠들고 평소처럼 퇴근하듯 사무실을 나왔는데... 아무래도 퇴사 여운은 오늘로 끝날 것 같지 않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서 나왔지만 막상 나오니 기분이 이상하다.

내일이면 남겨진 사람들도 나도 저마다의 길을 가야 하겠지만, 오늘만은 그냥 기분이 내키는 대로 흘러가야지.


좋은 기억만.

좋은 사람들만.

행복한 추억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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