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앙마이, 이 도시의 온도는 맥주의 온도다 -
태국 북부의 태양은 정직하다. 치앙마이의 낮은 시간은 빠르게 달아오르고, 그 열기는 공기보다도 피부에 먼저 닿는다. 거리에 서 있으면 빛이 아니라 무게에 눌리는 느낌이다. 대화는 줄고, 동작은 느려지고, 사람들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무언가를 마시고 있다. 그 손엔 대개 유리병이 들려 있다. 초록빛의 창(Chang), 금빛 사자가 그려진 싱하(Singha), 빨간 라벨의 레오(Leo). 모두 탄산이 살아 있는 태국 맥주다.
처음에는 단순한 선택이었다. 무언가 차가운 것이 필요했고, 그중에서 가장 쉽게 손에 들어오는 것이 맥주였다. 하지만 그 선택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치앙마이의 더위는 단순히 땀을 흘리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감각을 마비시킨다. 미각은 무뎌지고, 후각은 지치며, 입안은 늘 끈적하다. 그런 상태에서 와인의 복합적인 풍미나 위스키의 높은 도수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혀는 느끼지 못하고, 머리는 피로해지며, 술은 술이 아닌 체온으로 작용한다.
반면 맥주는 즉각적이다. 탄산이 입안을 감돌고, 목을 지나가며 차가움이 퍼질 때, 정신이 짧게나마 선명해진다. 그것은 맛이 아니라 반응이다. 쾌락이라기보다 회복에 가까운 반사 작용이다. 차가운 잔을 입에 대는 순간, 햇빛이 아닌 무언가가 몸 안을 통과한다는 확실한 감각. 와인은 천천히 즐기라고 말하지만, 이 도시에선 술조차 서두른다. 감각이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지역의 열대 몬순 기후는, 체온 조절과 수분 대사 측면에서도 맥주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한다. 평균 습도는 70-80%에 이르며, 체온에 가까운 35도 안팎의 온도가 지속된다. 이런 환경에서 도수가 높은 와인(12-14도)은 체온을 더 올리고 탈수를 유발할 수 있다. 반면 알코올 도수가 낮은 맥주(4~5도)는 위장 부담이 적고 갈증 해소에도 적합하다. 마시는 즉시 열을 빼앗기 때문에, 생리학적으로도 더운 기후에 잘 맞는 술이라 할 수 있다.
태국 전역에서는 주류 판매 시간이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그리고 오후 5시부터 자정까지 주류 판매가 허용된다. 치앙마이 역시 이 규정에 따라 운영되며, 현지인들과 여행자들 모두 이 시간에 맞춰 맥주 한 잔의 타이밍을 조율하게 된다. 특정 시간대에만 가능한 이 '맥주 접근성'은 도시의 리듬에 독특한 박자를 더한다. 그래서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는 주류를 구매할 수가 없다.
음식과의 조화도 맥주 쪽으로 무게를 싣는다. 치앙마이 요리는 향신료가 강하고 산미와 단맛이 섞이며, 조리 온도가 높은 편이다. 똠얌꿍, 쏨땀, 팟타이 같은 음식은 입 안에 다양한 온도와 향을 남긴다. 이런 조합에서 와인의 섬세한 풍미는 쉽게 압도당하거나 부조화를 일으키기 쉽다. 반면 가볍고 쌉쌀한 라거 계열 맥주는 입안을 리셋해 주고, 매운맛을 눌러주는 역할까지 한다. 특히, 커피가 섞인 창 에스프레소 맥주(Chang Espresso Lager)는 감칠맛이 돈다. 태국의 더위는 라거마저 진화시킨다. 차가운 커피 한 잔과 맥주 한 모금의 경계를 흐리는 이 지역의 창의성은, 어쩌면 치앙마이 산맥 어딘가에서 자란 원두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여행 초기에는 와인을 찾는다. 숙소 근처 바의 와인 리스트를 훑고 익숙한 레이블을 고르고, 서빙된 잔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모금이 넘어가기 전에 이미 지쳤다. 잔에 남은 온도는 이 도시의 기온과 다르지 않았고, 향은 공기 속 향신료와 뒤섞여 사라졌다. 와인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부적응처럼 느껴졌다. 결국 잔은 테이블에 남겨졌고, 다음 날 손에 쥔 건 차가운 캔맥주였다. 치앙마이는 그런 도시다. 맥주가 특별해서라기보다는, 맥주 외의 것들이 버거운 도시. 이 도시에선 정교함보다 명료함이, 여운보다 즉각성이 더 어울린다. 창은 한낮의 열기를 식히는 도구처럼 쓰였고, 싱하는 저녁의 느긋한 대화 속에 머물렀으며, 레오는 조용한 밤의 침묵을 덮는 데 쓰였다. 이 셋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역할을 맡아, 여행자의 하루를 나눠 들고 있다.
공간도 그 술에 따라 달라진다. 창은 시장 옆 식당에서, 싱하는 루프탑 바에서, 레오는 야시장 뒷골목이나 숙소 발코니에서 가장 잘 어울린다. 치앙마이의 거리에는 와인을 천천히 음미할 만한 조도가 없다. 대신 바람이 있고, 땀이 있고, 빨리 식히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 도시의 리듬은 와인 잔을 돌리는 손보다, 병째 마시는 맥주에 더 가까운 속도다. 결국 여행자는 이해하게 된다. 이 도시에서 맥주를 마시는 이유는 맛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그것은 치앙마이의 열기와 습도, 음식의 강렬함, 그리고 즉각적인 반응을 필요로 하는 감각 구조에 대한 하나의 적응 방식이다. 여운보다 생존에 가까운 선택. 와인은 향을 남기지만, 이곳에서의 맥주는 그 순간의 체온과 풍경을 씻어내는 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