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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 그리고 금빛으로 춤추는 영혼의 파동

『Wave 시리즈』를 바라보며

by 두유진

한 작품 앞에 멈춰 서는 일은, 때때로 누군가를 깊이 이해하려는 마음과 닮아 있다.
처음엔 낯설고 어렵지만, 시선을 오래 두고 마음을 기울이면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작가의 숨결과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작가 이상언의 『Wave 시리즈』는 바로 그런 그림이다.


검은 여백 위에 펼쳐지는 백색의 흐름, 그리고 그 사이를 유영하듯 지나가는 금빛의 떨림.
그림은 정적이지만, 결코 멈추어 있지 않다. 작가는 말한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라고.


그 문장은 마치 선언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 선언은 그의 그림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의 그림 속 인물은 대부분 발레리나다.
정교하게 묘사된 발레리나의 얼굴이나 복식은 없다.
대신 몸짓과 동작,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선의 흐름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의 외형이 아닌, ‘존재 자체의 진동’을 그려낸다.
우리는 그 진동을 따라가며,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서 잊고 있던 파동을 다시 느낀다.

추상, 감정을 담는 그릇


그는 한때 상념에 잠긴 인물들을 그리곤 했다. 그러다 발레리나를 만나고, 어느 순간 더 이상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느낌’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여정은 자연스레 추상으로 이어졌다.


Lucy Bull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예술은 결국 다 추상”이라면, Lee Sang작가의 그림은 우리 마음속 깊은 울림을 건드리는 파동의 언어다. 나는 이 시리즈 앞에서 ‘선’이 ‘소리’처럼 느껴졌다.

한 붓의 선이 누군가의 숨소리를 닮았고, 금빛의 곡선은 어떤 눈물의 여운처럼 느껴졌다.
그림에서 울리는 감정의 공명은 설명보다 직관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흔들린다.
그래서인지 『Wave 시리즈』는 누구에게나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치유의 언어가 되고,
또 어떤 이에게는 멈추고 있던 감정을 다시 흐르게 만드는 시작점이 된다.

검정과 흰색, 그리고 금빛의 미학


작가의 그림에서 색은 제한적이다.
흑과 백, 그리고 금.
그러나 이 세 가지 색의 조합은 그 어떤 다채로운 색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검정은 깊이와 침묵
흰색은 여백과 가능성
금빛은 생의 반짝임과 희망을 상징한다.


그 위에 흘러가는 선들은 춤추고 있는 감정 그 자체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음악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한 선 한 선이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에 마음이 맞춰진다.

Lee Sang작가의 그림은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 대신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을 감상할 때, 말보다는 호흡이 먼저 조절된다.
천천히 들이쉬고, 길게 내쉬다 보면 어느새 그림과 내가 같은 박동으로 움직이고 있는 걸 느낀다.
그건 마치 내 안의 어떤 감정이 그림과 연결되었다는 신호다.

이 파동의 세계에 들어오기를..


『Wave 시리즈』는 단지 미적인 즐거움을 주는 작업이 아니다.
그림은 하나의 경험이며, 때로는 내면의 거울이 된다.
작가가 흑과 백, 금빛이라는 최소한의 색으로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안에 그의 고요하고 치열한 사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선은 단지 형태가 아니라, 하나의 문장이고, 고백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백을 마주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응답하게 된다.

나는 이 그림들을 보며, 오래된 내 감정 하나를 꺼내 보았다.
말로 표현되지 않던,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던 그것.
그 감정이 그림 안에서 흔들리고 춤추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 작업은 나에게 ‘예술’ 그 이상의 의미였다.
이건 ‘파동’이다.
내가 잊고 있었던 내 안의 생명력을 다시 깨우는 진동이다.


초대


당신도 이 ‘Wave’ 속으로 들어오기를 바란다.
그림이 건네는 미세한 진동을 느끼고, 그 속에서 당신만의 울림을 발견하길.
흑과 백, 그리고 금빛으로 펼쳐지는 감정의 세계가
당신의 마음 한 켠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길 바라며.


이상언 작가의 개인전에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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