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그레이스에게
오랜만에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를 다시 보았어. 10년 전에도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이었지만, 지금 다시 마주하니 전혀 다른 질문들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 질문들은 오래전 네가 붙잡고도 끝내 풀지 못했던 의문이었고, 내가 10년을 건너 살아오면서 비로소 대답할 수 있게 된 이야기가 있어. 그래서 오늘은 그 질문들을 너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었어.
그때의 너는 늘 앞날을 불안해했지. 하루하루를 버텨내면서도, 완벽하지 못한 자신을 자주 탓했어. 그림을 그리면서도 교실에서 아이들과 웃다가도, 집으로 돌아와 글 앞에 앉으면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심이 늘 따라다녔다. 그 불안은 마치 그림자처럼 너를 따라붙었고, 너는 그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 더욱 애쓰며 지쳐갔지.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가장 먼저 전하고 싶었어. 불안이 지금의 가치를 잠식시키지 않게..
드라마 속 유진오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도네.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라면 한 그릇에도 마음껏 행복해할 수 있는 바로 지금.”
2017년 처음 네가 『시카고 타자기』를 봤을 때도 그 대사를 들으며 잠시 울컥했지만, 정작 삶에서는 그 말을 붙잡지 못했어. 늘 더 나은 내일, 더 완벽한 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네 일상은 너무 쉽게 흘러가곤 했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확신해. 평범한 오늘의 소소한 기쁨, 그것이야말로 10년 뒤의 나를 살아 있게 한 힘이었다는 것을. 아이들의 한마디, 부모의 작은 감사, 네가 새벽에 몰래 써 내려간 문장 하나, 따뜻한 커피 한 잔조차도. 그 순간들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면, 너는 훨씬 더 일찍 자신을 안아줄 수 있었을 거야.
2025년의 너는 지금의 순간을 조금만 더 귀하게 여겨주길 바란다. 그 평범한 날들이 쌓여 2035년의 나를 지켜주었듯, 오늘의 너 역시 언젠가 미래를 떠받칠 단단한 토대가 될 테니까.
그리고 또 하나, 나는 너에게 “무엇을 위해 쓰는가”라는 물음을 남기고 싶다.
그때의 너는 글을 쓰면서 늘 흔들렸다. “내가 쓰는 글이 과연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까? 이건 그냥 혼잣말에 불과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네 마음을 잠식하곤 했다. 때로는 원고를 지워버리고, 때로는 아무도 읽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발송 버튼 앞에서 망설이기도 했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알아. 글은 대단한 답을 내리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글은 누군가의 박수를 받기 위해 쓰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글쓰기는 결국 흔들리는 자신을 붙잡는 방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불안에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도, 후회와 자책 속에 갇혀 있던 순간에도, 내가 펜을 잡고 한 문장이라도 써 내려갔던 이유는 그 흔들림을 기록하며 내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돌아보면, 글을 쓴다는 건 살아낸 흔적을 붙드는 일이었어. 네가 느낀 기쁨과 슬픔, 교실에서의 사소한 에피소드, 누군가의 결혼식에서 울컥했던 감정, 심지어는 너 혼자만 아는 좌절과 고민까지도, 글로 옮겨놓으면 사라지지 않고 삶의 일부로 남았다. 그렇게 쌓인 문장들이 결국 나를 버티게 했고, 시간이 흘러 다른 이에게 건네질 때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누군가의 삶을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나는 너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무엇을 위해 쓰는가?”라는 물음 앞에서 흔들리지 말라고. 답은 이미 네 안에 있다고.
너는 글을 통해 너 자신을 지키고 있었고,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었다. 누군가 읽든 읽지 않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
중요한 건 네가 여전히 쓰고 있다는 사실, 그 행위 자체가 네 삶을 단단하게 지켜주고 있다는 진실.
이 두 가지 물음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와 “무엇을 위해 쓰는가”는 결국 하나의 답으로 모아져.
오늘을 기록하는 일, 그 순간을 살아내는 일.
그것이 내가 살아왔던 방식이자 앞으로도 살아갈 방식이다.
2025년의 그레이스
부디 지금의 너는 자신을 자주 탓하지 말고, 순간을 사랑하며, 쓰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10년 뒤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여전히 글을 쓰며, 여전히 작은 행복들을 붙잡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의미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네게 전하고 싶어.
사랑과 확신을 담아,
2035년의 그레이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