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어도 괜찮은 사람일까
힘든 여름이 다가왔다. 또다시 시작된 자책의 6월이었다.
나는 이 병원의 거의 유일한 장기 내원 환자다. 이만큼 오래, 이만큼 자주 보는 환자는 김마음 님밖에 없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말은 곧 내가 지독히도 낫지 않는 환자라는 뜻이겠지.
묘하게 그 말이 날 자극했다. 그 말속에 담긴 배려를 알면서도, 나는 다르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만큼 생각하고 있어요. 신경 쓰고 있어요.'라는 뜻이었을 텐데, 나에게는 마치 '너 언제까지 안 나을래?'처럼 들렸다.
언젠가부터 데스크 선생님들이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접수할 때, 결제할 때, 다음 진료를 예약할 때, 약 봉투를 넘겨주실 때 등 찰나의 순간에 미묘하게 차가운 표정과 말투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날이 데스크 선생님께 유난히 힘든 날이었을 수도 있고, 다른 환자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변화들이 전부 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자주 오고, 약도 많은 내가 신경 쓸 거리를 하나 늘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래 진료를 갈 때마다 나는 진료 전에 검사를 했다. 우울, 불안, 공황, 분노, 강박, 자살 검사를 매번 돌아가면서 하고 있었다. 데스크 선생님들은 내가 갈 때마다 검사지를 챙겨주셨고, 내가 검사를 마칠 때마다 컴퓨터로 결과를 처리하셨다. 이 부분에서도 나는 미안해졌다. '내가 안 오면 이런 귀찮은 일이 없을 텐데. 내가 매번 와서 이런 검사를 하는 바람에 귀찮은 일이 많이 늘었네.'
진료기록을 떼어오던 날도 데스크 선생님들의 눈치를 봤다. 오래 다녔고, 자주 다닌 덕분에 나의 진료기록은 무려 150장이나 되었다. 이걸 출력하고 정리해서 나에게 주기까지 얼마나 번거로우실까. 그 수고로움에 나는 또 미안해졌다.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요구를 하고서도 나는 한껏 위축됐다.
어떻게 보면, 어떻게 보면이 아니라 당연히, 그것이 그분들의 역할이고, 그분들이 맡은 임무라고 여길 수도 있었다. 그분들이 특별히 내게 냉랭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내가 와서 민폐야, 내가 문제야'라는 자책감을 안고 다녔다.
자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오랜 기간 낫지 않는 내가 선생님께는 얼마나 부담스럽고 싫은 존재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자주 가서 뵐 수 있고 말할 수 있어서 나는 너무 좋지만, 선생님은 과연 내가 오는 게 좋으실까? 약을 써도 듣지 않고, 자살 위험성으로 마음의 부담까지 지우는 나 같은 환자가 과연 반가울까? 이제는 그만 오길 바라고 있지 않을까? 생각의 끝은 역시 '내가 있어서 민폐야, 나는 쓸모없는 존재야'였다.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은 합창단에서도 이어졌다. 합창단이 합창제에 나가게 되어 단원을 선발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나는 여기서도 내가 얼마나 필요 없는 단원일까를 걱정했다. 함께 무대에 서고 노래하고 싶었지만, 소리를 낼 수 없는 내가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생각하며 스스로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속상하고 아쉬웠다.
...
진료실에서 이런 마음을 털어놨다. 병원에 올 때마다 여러 가지로 많이 신경을 쓰게 된다고. 진료에 있어서도 내가 얼마나 짐스러운 환자일까를 늘 생각하게 된다고. 합창단에서도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힘들다고. 게다가 나는 내 상태에 대한 자기 의심도 더해져 있었다. '너 괜찮지 않아? 엄살 부리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매일 나를 공격했다. 하지만, 정말 또 안 괜찮았다. 진료실에서는 매번 눈물을 훔치기 바빴다.
"오늘 하신 얘기 들어보면 안 괜찮은데요. 내가 스스로 쓸모없다는 생각 때문에 안 괜찮으신 거 같아요."
- "... 그냥 다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와서 선생님 뵙고 싶은 건 맞는데 올 때마다 너무 힘들어요."
"어떤 게 그렇게 힘드신가요?"
- "집에선 그냥 잘 참거든요. 잘 울지도 않고. 근데 병원에 오면 자꾸 못 참아요. 저는 제가 우는 것도 싫어요. 이것도 민폐인 것 같아요. 제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런 생각이 계속 드시는 것 같아요. 내가 잘못하고 있다, 민폐다, 쓸모없는 것 같다. 지난 시간에 칭찬에 집착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칭찬받는다는 건 내가 쓸모 있다, 민폐가 아니다, 가치 있다를 확인받는 거라서, 그래서 집착하시는 것 같아요."
- "이렇게 말하다가 집에 가면 그냥 멍해져요. 내가 뭘 바라는 건지, 뭐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고. 맨날 똑같아서. 그냥 힘든 것 같아요."
"빨리 나아지지 않는 것도 민폐다,라고 느끼시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똑같다, 맨날 똑같다. 칭찬도, 주변에서 칭찬해주지 않으면 내가 스스로에게는 괜찮다, 잘하고 있다, 민폐 아니다, 쓸모 있다라고 말해주지 못해서 남들의 칭찬에 집착하게 되는거죠. 김마음 님 마음의 디폴트 값이 쓸모없다이기 때문에."
- "... 이것도 여러 번 들었던 얘기잖아요. 근데, 제가 안 바뀌잖아요.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같이 한번 고민을 해봅시다. 어떻게 하면 바뀌어볼 수 있을지."
- "저는, 계속 똑같잖아요."
...
저는 안 바뀌잖아요. 똑같잖아요.
울음과 함께 속마음이 터져 나왔고, 미처 진정하지도 못한 채 진료실을 나왔다. 그 말은 선생님을 탓하는 말이 아니었다. 또다시 나를 찌르는 화살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너는 안 바뀌잖아, 너는 똑같잖아, 너는 어차피 계속 이 모양일 거잖아, 지금 네가 하는 일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어, 그냥 모든 걸 끝내. 내 내면의 어둠이 계속 나에게 속삭였다.
그래서 그 말은 선생님을 향한 절박한 구조 요청이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안 되는데 제발 알려주세요, 저를 놓지 마세요 와 같은 말이었다. 나는 그 말로, 겨우 나를 붙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