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별펭귄의 이야기3
나 자신을 찾아보자며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얼마 가지 못해 난관에 부딪힌다. 이 길이 맞나. 내 안에 있던, 주변 사람들 눈치를 잔뜩 보는 녀석이 또다시 나타나 훼방을 놓는다.
이 글을 써도 되나,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내가 가진 상처나 아픔들을, 나 자신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내 글이 남들에게 또 하나의 짐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다. 내가 글을 적은 의도와 다르게 왜곡되어 세상이 받아들일까봐 무섭기도 하다.
두손을 휘휘 내젓는다. 온갖 사념들을 물리쳐본다. 다시 집중해본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뿐인 '나'다.
네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 네 가슴속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이야기를 써.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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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이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누군가에게는 약간의 위로가 되길 바란다. 누군가에게는 이 친구가 이런 일을 겪었고 이렇게 성장했구나 하곤 타인의 일부를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기분을 환기하며 마음에 와닿는 좋은 글들을 읽고 싶은 분들은 이쯤에서 살포시 뒤로가기를 눌러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아래부터는 투박하고 조금은 날 것의 친구들이라서요.. )
이전에 쓴 글 '나는 퇴사를 결심한 공무원이다'의 조회수가 생각보다 많이 나와 얼떨떨했다. 정말 퇴사 관련 콘텐츠는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나의 상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데에 또다시 마음이 아파왔다.
소속감과 인정욕구.
지난 편에서 밝혔듯 부끄럽고 조금 수치스럽지만 이것이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다.
내 안에 있는 몇 마리의 진솔한 감정들을 끄집어 올려 세상에 보여준다. 물론 날 것 그대로의 상태는 아니었다. 나의 감정들과 마음들은 바람에 마모되고 시간에 으스러져서 반건조 생선 정도의 상태였다. 군데 군데 촉촉하지만 말라 비틀어지는 중인 반건조 생선의 마음은 뭔가 처연해보이고 어설퍼 보이기도 한다.
한편 내 안의 욕구들 중 대중에게 관심 받고 싶은, 꽤 성깔있는 친구들은 태초 날 것 그대로의 마음을 못 적어서 아쉬워한다. 사람들의 무한한 관심을 받고 싶은 친구들은 판을 키우고 자극적인 글을 써서 더 많은 '좋아요'와 '댓글'을 받았어야지 하는 생각도 일순 든다.
이때 나의 소심함과 착한아이 콤플렉스가 빛을 발한다. 남에게 의도치 않은 상처 단 하나라도 주기 싫은 마음이 나의 욕구를 이긴다. 세상에 자극적인 글들이 많다면 나처럼 삼삼한 맛의 글도 있어야 균형을 이루지 않을까 하고 자족해본다.
(아쉽게도 이번 편은 공무원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을 다니는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아픔을 겪는다. 인간은 아프고 상처받음에도 그럼에도 하루를 살고 있구나. 하루를 오롯이 살아낸 모든 사람들은 모두 다 대단한 존재들이구나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나는 공감의 힘으로 세상에 아픈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글을 쓴다. 글의 힘을 믿어본다.
학교도,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 기억 속의 머―언 옛날, 나는 나의 할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너는 도대체 왜 태어났니. 아들도 아닌 게 왜 태어났어'
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아이 시절에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자라면서도 저 말들은 반복되었다. 점점 머리가 크고 질문에 섞인 의도를 알아채면서부터는 속이 상했고 마음이 아팠다.
나는 가족에게조차 나의 존재 이유를 부정 당했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왜 태어났느냐는 물음은, 그보다 더한 차별과 그들의 행동들은 내가 사춘기가 되고 어느 정도 반항을 하게 되기 전까지 계속 반복됐다. 지겨울 정도로 듣고 또 반복됐다.
억울했다. 내가 내 의지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같은 생각도 했다. 한편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을 안듣고 그 분들의 속을 썪일 때면 나는 정말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인 건가 내가 나 스스로의 존재 자체를 의심했다.
그리고 이내 궁금해졌다. 어느 순간 내가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무슨 일을 하려고 태어났을까. 나는 왜 존재할까.
만약 남자 아이처럼 굴면 내 존재가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곤 축구, 야구, 농구 등 각종 공놀이에 공을 들여보기도 하고, 바지만 주구장창 입어보기도 했다. 내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면 이 세상에 있어도 될까 싶어 사람들을 웃기려고 온갖 몸개그, 말개그를 늘어놓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남을 웃기는 데 재능이 별로 없었다..)
한편으로는 남자로 태어난 착하고 순둥한 내 남동생을 그렇게도 많이 괴롭혔다. 시기와 질투였다. 특히 부모님이 동생과 비교하며 혼을 내실 적에는 나의 자격지심이 더욱 솟아올랐다. 괜히 이유없는 꿀밤도 맥여보고, 텃세도 부렸다. 돌이켜보면 참 못난 누나였다. (정말이지 많이 사랑하고 아낀다, 나의 하나뿐인 동생!!)
어린시절 책을 열심히 읽은 이유도 내가 왜 태어났나 궁금해서였다. 어떻게 살아야 내가 이 세상에서의 쓸모를 다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모두들 책에서는 뭐든 찾을 수 있다길래 내 삶의 이유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책을 열심히 읽었다. 별의별 책을 다 읽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그것은 나의 세계를 둘러싼 가장 큰 질문이었다.
―.
어느 순간부터 나는 '너는 왜 태어났니' 라는 질문에 '착한 아이'로 답했다. 그렇게 나만의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 가면이 만들어졌다. 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온몸에 둘둘 두르고 이 세상을 대했다. 사람들의 눈에 착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살아 있어도 된다고 허락 받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 자신에 집착했다. 나의 못나고 부족한 부분은 철저하게 숨겼다. 나의 부족함 마저 들켜버리면 세상에서 내 존재의 의미가 희미해질까봐 두려웠다.
나에게는 단점도 있고 부족한 부분도 있다. 정말 많다. 나는 인간이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나의 모자란 부분들을 세상에 보여주기가 끔찍이도 싫었다. 남들을 시기 질투하고, 부러워하기도 하고, 때론 화가 나기도 하는 자연스러운 그 모든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전부 다 싫었다. 내가 나쁘다고 판단한 모든 감정들은 나 스스로에게 봉인당했다. 나만의 판도라 상자에 꾹꾹 눌러담아 가둬졌다.
판도라 상자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세상을 버텼다. 스스로가 상자에 긁히고 아파하며 상처받는 지도 모른 채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살았다. 가면 없이는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어느 새 그것들은 나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착한아이' 가면에 전도당해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월리를 찾아라 책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생각보다 월리를 찾기가 힘든 것을 말이다. 나에게는 나를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다. 가면으로 치장한 것이 나인지 아니면 내가 가면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어느 순간 무언가에 대한 나의 주관도 선호도 사라졌다. 남들이 좋다면 좋은 것이고, 싫다면 싫은 것이었다. 나에겐 좋은 게 좋은 것이었다. 나의 시선은 밖을 향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상대방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조마조마하고 위태위태한 날들이 지나고 기어코 일은 벌어졌다. 차곡차곡 모아왔던 부정적인 감정들의 끝판왕, 판도라 상자는 가득 차다 못해 터져버렸다. 부정적인 감정들에 침잠했고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열려버린 판도라의 상자는 헤어나오기 힘든 늪이었다.
꽤 오랜 시간을 방황했다. '착한아이' 가면은 내려놓지 못하고 열려버린 판도라의 항아리를 두 손에 든 채로 이리저리 심리적 방황을 했다.
나 자신을 찾기 너무 어려웠다. 어디에 뭐 그리 꽁꽁 숨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를 찾아 헤메고 또 헤메던 나는 지쳐 자리에 주저 앉았다. 모든 걸 내려놓았다. 가면도 내려놓고 항아리도 내려놓고 웃는 나도 남들 눈치보던 나도 착함에 대한 집착도 모두 다 내려놓았다. 그제야 내가 보였다.
나는 그냥 늘 나였다.
문득 나 자신이 한 마리 펭귄 같았다.
남극의 혹독한 추위를 겪고 눈보라 속에서도 따뜻한 온기를 잃지 않고 꿋꿋이 이겨내 기어코 성장한 펭귄 한 마리. 그냥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한 마리의 펭귄. 그것이 나였다.
나 자신을 자각하고 나니 주변에 함께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상의 순간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호의가 눈에 들어왔다. 책 속의 사람들의 마음들이 감정들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감사하게도 나의 주변에는 나를 생각해주는 수많은 소중한 사람들이 늘 곁에 있었다. 가면과 부정적인 모든 것들이 온통 나를 감쌌음에도 세상 곳곳에서의 사랑들이 끊임없이 날 지켜주었다. 나는 그들이 온몸으로 감싼 원 속에서 방황했고 그 안에서 다시금 나를 찾아갔다.
펭귄이 서로를 기대어 둥글게 둥글게 말아 선 원처럼 그들은 내 주위로 둥그렇게 큰 원을 그렸다. 남극의 추위는 모두의 힘으로 이겨내는 것이었다. 서로를 향한 연대와 사랑과 공감으로 이겨내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사람들을 선하게 바라보고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세상을 자신들만의 빛으로 반짝반짝 비추고 있었다.
나는 나를 찾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았다.
―.
바로 사랑하고 공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여기 있는 나로서 존재한다. 나는 그저 한 인간이고 우주의 먼지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사랑하는 가족이자 친구이기도 하다.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책을 읽은 일일 것이다. 책을 통해 어릴 적의 나는 소위 말하는 나쁜 길로 새지 않았고 사람을 배웠고 인생을 배웠다. 그리고 어른이 되서는 책을 통해 상처를 치유받고 또 새로운 것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중이다.
상처는 다시 아물고 새 살이 난다. 상처와 아픔은 나 자신을 강하게 만든다. 시간의 흐름 속에 상처는 점점 무뎌져만 간다.
참 싫어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문구들이다. 진리는 간결하고 단순하다. 삶의 원리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진리에 따라 나는 상처받은 과거의 나마저도 긍정해보기로 한다.
나는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며 뒤늦게 나 자신을 알아간다. 그리고 나의 상처들은 어쨌거나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말 한 마디가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알기에 더 고운 말을 쓰는 법을 배웠다.
나는 이런 아픔들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상처 받지 않기를 바란다. 나 자신도 외롭고 힘들고 아픈 누군가에게 다정하고 포근한 온기를 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인생이란 아픔과 상처다. 그러나 진정한 인생은 아픔과 상처로 끝나지 않고 그것들을 내가 어떻게 조리해서 무엇을 만드느냐에서 판가름나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인생을 만들어 가고 있고 앞으로도 가꾸어 나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바라고 원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pixabay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