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별펭귄의 이야기 2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고민, 번뇌, 아픔 등 수많은 감정들 그리고 켜켜이 지층처럼 쌓여온 나의 시간들이 수십만 번도 넘게 교차했다.
나는 먼 지평선까지 놓인 기찻길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이내 선로 전환기를 조정한다.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시간이다.
나는 어떠한 미래를 상상하는가. 지금의 나는 그곳을 가기에 충분한가.
직장인이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 봤을 퇴사 고민에 나의 이야기를 더한다.
다만 회사 험담보다는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춘다. 결국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은 나 자신이다. 앞으로의 미래를 살아 낼 것도, 지금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나 자신이다.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내가 오늘을 살 수 있는 건 과거의 나 자신이 지금의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 다른 선택을 내리기로 한다.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잘 부탁한다고 이야기를 전한다.
조심스럽게 나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앞으로 펼쳐놓을 이야기는 그저 나의 경험이고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다.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덧붙인다면 나는 내가 머문 모든 지역들과 과거의 모든 경험들을 사랑하고 싶다. 그뿐이다.
내가 회사에게 바란 것들 중 하나는 바로 소속감이었다.
나는 지방직 공무원이었다. 모두들 직장을 구하러 서울을 향해 갈 때 서울에 살던 나는 지방으로 향했다. 그 당시 나는 지방의 여유로움을 동경했다. 저마다 다른 지역 문화와 풍토 그리고 지역 문화 콘텐츠에 매료되었다. 사투리의 높낮이가 마치 노랫가락처럼 친근했고 사람들의 정감 가득한 문화들을 기대했다.
이전의 나는 사기업을 다녔고 이후 공무원을 준비했다. 내가 공무원 시험 수험생인 시절 코로나19가 한창이었다. 고용위기, 채용 한파의 험난한 시기에 다행히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기뻤고 감사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꿈꿨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리라는 기대에 들떴다.
부끄럽지만 약간의 사명감도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이 해당 지역사회에 손톱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특정 지역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약간의 자부심이 밥도 먹여준다니 좋을 일이었다.
사회생활을 아주 조금은 해봤지만 나는 여전히 순진무구했다. 현대사회에서 순진무구하다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다. <각각의 계절> 속 단편 소설, <무구>의 문구가 떠오른다.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무구하지 않았다.
큰 욕심 없이 평범한 소시민으로 순진무구하게 살고 싶었던 소망이 공중에 뿌연 먼지들처럼 산산이 흩어진다.
―.
나는 집단성을 간과했다. 집단의 폐쇄적인 특징에 무지했다. 타지에서 온 이방인에게 배타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방직 공무원은 지리적 특성상 자연스레 지역적 특색이 강한 편이다. 그곳엔 텃세가 있었다. 텃세는 생각보다 매서웠다.
공조직과의 첫 만남, 모두가 본적과 고향을 물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고향을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악의 없이 궁금증에 한 말들, 악의와 시기 그리고 질투가 섞인 말들이 나의 주위를 에워쌌다. 철창 안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에게서 지역적 공통점을 찾지 못한 일부 사람들은 얼마 가지 못해 내게 텃세로 화답했다.
타지 생활에 외로웠던 나는 소속감을 원했다. 커다란 한 조직 아래 속하고 그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무엇보다 어디엔가 속해있다는 느낌을 받기를 원했다. 공무원은 모두가 알다시피 안정적인 직업이었고 당연히 오래 다닐 생각이었기에 당시의 내게 회사 동료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소중했다.
사람들을 워낙 좋아하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직장에 마음을 너무 열어버리고 말았다. 그들의 차별 섞인 시선에 아팠고 그들의 지방이 어쩌고 서울이 어쩌고 하는 수많은 말들에 상처 입었지만 애써 괜찮은 척했다. 생글생글 많이 웃었다. 더더욱 넉살을 부렸다. 일을 잘하면 텃세도 괜찮아지겠지 싶어 일도 열심히 했다. 나의 성격은 내향적이지만 그런 나 자신을 억누르고 사교적인 나, 외향적인 나를 매일같이 연기했다. 나는 스스로가 만들어 낸 집단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에 잡아먹혔다.
하지만 사회는 냉정했다. 사회생활이란 것은 일만 잘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노력으로만은 해결할 수 없는 선이 분명 있었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나는 이방인이었다. 집단에 들어가지 못한 채 공중을 떠도는 소행성이자 먼지 덩어리였다.
물론 나를 어설프게나마 자신만의 방식으로 환영해 준 이들도 있었음을 나는 안다. 나를 배척한 사람들도 마냥 나쁜 사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역성을 핑계로 나를 못되게 군 사람도 분명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그 사람의 인성 문제였을 것임을 안다.
다만 아는 것과 느끼고 와닿는 것의 차이는 크다. 상처는 아물지 않고 계속해서 벌어졌다. 해가 지나고 자리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도 그들의 편견은 식지 않고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서도 지역에 대한 편견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나는 나 자신마저 싫어졌다.
한편으로 만약 내가 조금 더 소속감에 대한 욕구를 낮추었다면, 공과 사를 구분하고 사람들에게 일정 이상 관계의 선을 그었더라면 괜찮았을까 싶기도 하다.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던 한 사람의 욕구는 계속해서 좌절된다. 좌절은 일에 대한 의욕까지 좀먹는다. 조직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언젠가 조직이 더 좋은 방향으로 변하리라 기대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아닌 것 같다.
퇴사를 향한 나의 욕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세계를 살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 이방인이다. 외로웠지만 외롭지 않아 보려고 바둥거린 섬 하나가 있다. 섬은 자신 스스로를 토닥인다. 외로워했던 감정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담담하게 밀리고 쓸려 흘러가도록 그저 놓아둔다.
어디엔가 소속되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인간人間.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그 말속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외로움이 녹아있다.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외로운 이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괜찮은 사람人間이 되고 싶다. 편견을 책이라는 도끼로 깨부수고 사랑과 정의와 희망으로 단 한 번뿐인 삶을 살고 싶다.
나는 인정욕구가 큰 사람이다. 세상에서 나의 능력과 나의 노력이 인정받기를 원한다.
공무원은 과거에 비해 성과 중심적인 조직이 되었지만 여전히 경직되어 있고 연공서열 위주로 돌아간다. 한 개인이 열심히 일하고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보상받기 어려운 체계다.
나는 그저 늘 그래왔듯 열심히 살았다. 어차피 대충대충 일하지 못하는 성격을 타고난 탓에 참으로 열심히도 일했다. 일개미같은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업무적으로는 후회가 남지 않는다.)
내 업무가 끝나면 내 능력이 닿는 대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발 벗고 나서서 도왔다. 업무를 하고 나서 잠시 시간이 남으면 업무 매뉴얼을 만들어 동기들과 공유했다. 틈나는 대로 부서 사람들이 찾기 쉽도록 각종 사무용품들을 종류별로 가지런히 정리했다. 오며 가며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줍고 분리수거를 했다. 청내 청소 아주머니들이 나의 이름을 기억해 두실 정도였다. 부서와 관련된 공모전에 공모하고 순위에 들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나는 오지랖이 너무 넓은 직원이었다.
공무원 조직 특성상 오지랖 많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좋게 비치지만은 않았다. 추측해 보건대 눈엣가시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공무원이라는 직장에 대해 큰 기대는 없었다. 어차피 승진은 때 되면 할 것이라 생각했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하루하루 즐겁고 이 조직에 기여하며 살고 싶었다.
다만 나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바랐다. 잘했으면 잘했다 말해주고 못한다면 서로가 이끌어 주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동화 같고 우화 같은 교훈적인 삶을 바랐던 듯싶다.
그런 나의 인정욕구는 소속욕구와 함께 좌절되었다. 사람들은 무시 내지는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나는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했던 불쌍한 초식동물 한 마리였다. 부끄럽게도 인정받고 싶다고 나 자신의 본질마저 던져 둔 그런 유치한 사람이었다.
왜 나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급급했을까. 나는 왜 스스로를 돌아봐주지 않았을까.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고 돌아봐주지 않았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내가 나를 바라보고 다독여주지 않았기에 더더욱 사람들의 시선과 인정을 갈구하진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인정욕구는 돌고 돌아 내 발등을 찍어 눌렀다.
그래서 나의 인정욕구를 선한 방향으로 분출시킬 방법을 찾아본다. 먼저 내가 스스로의 좋은 점들을 하나 하나 인정해보며 살아보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서도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일을 해보리라 다짐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 내가 원하는 일이다.
퇴사를 결심하기까지의 과정들은 그 자체만으로 험난하다. 브런치만 보더라도 퇴사에 대한 글들이 많다. 나 역시도 결정을 내리기까지 수많은 고민들이 뒤따랐다.
퇴사를 마음먹는 데도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하다. 퇴사로 잃게 될 기회비용들과 지금 나 자신의 마음과 현실을 비교하기란 쉽지 않다. 돌이켜보면 나는 공무원을 그만둔다는 내 결정이 맞는지 아닌지 끊임없이 남들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특히 공무원은 사직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은 직업이다. 공무원은 퇴사 후 리스크가 크다. 공무원에게 사직이란 제 발로 안정적인 직업을 발로 차 버리고 무한 경쟁 사회라는 정글로 성큼성큼 들어가는 일이다. 게다가 공조직에서 근무한 경력은 사조직에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사실도 퇴사 결정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렇게 한동안 '퇴사'를 키워드로 한동안 브런치와 유튜브 등등 각종 소셜 플랫폼 속을 뱅글뱅글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퇴사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그들이 내리는 퇴사 결정을 지켜보았다.
퇴사로 잃게 될 것들과 얻게 될 것들을 나열한다. 안정감, 소속감, 고정적 수입, 사회적 인정 등등 기회비용을 본다. 내가 하고 싶은 일, 건강, 꿈과 희망, 열정, 새로운 시도 등등 얻게 될 이익을 생각한다.
수많은 고민들과 결정들이 오고 간 후에 신중하게 결심을 세운다.
나는 퇴사를 할 것이다.
스스로의 퇴사 여부를 결정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남들의 퇴사 이야기를 듣고 교훈을 얻는 것도 물론 좋지만 결국 나 자신에게 귀 기울이고 나의 마음을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어떤 조직이 내게 적합한지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
직장을 고민한다는 것은 현실과 직결되는 돈과 시간에 대한 문제들, 나 자신은 누구인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내릴 수 있다.
결국 직장에 대한 고민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탐구하는 과정과 직결된다. 나의 하루의 3분의 1을 생활하는 공간은 쉽사리 무시할 수 없다. 개인은 조직의 분위기와 문화에 젖어 들어간다. 한 사람은 그 조직을 서서히 닮아가며 언젠가 그 조직을 닮은 인간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닮고 싶은 직장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내가 닮고 싶고,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 퇴사를 선택한다.
인생은 늘 그렇듯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을 내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 조직을 선택한 것도 나였고 나가기로 결심한 것도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퇴사에 후회는 없다. 그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
나 자신의 선택이 나를 향해 있고, 사람을 향해 있고, 사랑을 향해 있다면 나는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결정한다.
한편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물론 무능력하고 일 안 하는 공무원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역적 편견과 꼰대미 가득한 공무원도 있다. ― 언젠가 이 사람들처럼 되고 싶지 않아 퇴사하는 이유도 물론 있다. ―
하지만 비상근무를 서 가며, 지역 축제 현장에서 자신의 소중한 휴일을 반납해 가며,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는 공무원도 분명 있음을 꼭 말해주고 싶다.
늘 민원인들에게, 상사에게 치이고 상처받더라도 꿋꿋이 하루하루를 쌓아나가는 공무원분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버텨온 나 자신에게도 대견하다 한 마디 더해준다.
이 글의 끝맺음처럼 나의 퇴사도 잘 마무리 지어보기를 바라본다.
By. 민트별펭귄.
사진 출처 : pixabay
인용 출처 : 『각각의 계절』권여선, 문학동네
본문 출처 : 민트별펭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