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감정의 움직임에 동요하지 않는다.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 그리고 나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예로부터,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나무라면 젖을 먹던 아이가

그 자리에서 생 똥을 싼다는 말이 있다.


아이의 수유를 위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 해도 사람들과 불화가 생기면 젖을 먹는 아이가 먹는 것은 엄마의 사랑이 아닌 '엄마의 화'라는 독인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엘머 게이츠 Elmer Gaits박사는 인간의 ‘화’라는 감정에 대해 실험을 했다.


인간이 토해 내는 숨을 액체 공기로 냉각하면 침전물이 생기는데 이 침전물의 빛깔이 호흡할 때의 감정에 따라 달라졌다. 화를 내고 있을 때는 침전물의 색깔이 밤색, 슬픔과 고통일 때는 회색, 후회로 괴로워할 때는 분홍색, 기뻐할 때는 청색을 나타냈다.


화가 났을 때 입에서 나오는 공기를 흔히 홧김이라 하는데, 이 밤색 침전물을 쥐에게 주사했더니 그 쥐는 불과 수분 만에 죽어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만일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계속해서 화를 낸다면 80명을 죽일 정도의 독소가 발생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화를 내는 사람의 몸속을 생각해 보자.

온몸이 무서운 독으로 가득 차 있고, 무서운 독이 온몸에 전파가 되니 건강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스트레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마음에 병이 생기고,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을 키운다는 것을 말한다.


미국 보스턴대 데이비드 발로우 David Barlow교수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부정적 정서를 억압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오히려 부정적 정서 경험을 더 많이 한다’는 사실을 실험연구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부정적인 정서를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수용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불쾌하고 감당하기 어려울지라도 그 감정은 내 경험의 일부이자, 나 자신의 일부라는 생각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투쟁의 대상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자기의 일부’로 보듬는 지혜가 필요하다.



영원히 지속되는 감정은 절대로 없다.


감정의 ‘emotions’은 모션’motion’ 즉, 움직임’movement’에서 나왔다.


감정은 끊임없이 이 감정에서 그리고 저 감정으로 옮겨간다. 지금은 슬프지만 어떤 순간엔 기쁠 수 있고, 지금은 행복하지만 또 어떤 순간엔 화가 날 수도 있다.


명상을 하는 것은 이런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고, 감정의 근원인 생각을 적절히 통제하여 어떠한 감정의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으려 애쓰면 그것이 점차 습관이 된다.


우리는 감정을 느끼고 알되, 다만 감정의 움직임에 동요하지 않는 자신이 되어야 감정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전 10화 나는 '행운아' 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