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뭐가 그리도 부족한 게 많을까요?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이 그리도 잘못되었을까요? 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요? 우리가 스스로를 뭔가 부족하고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다음의 근원적인 이유로부터 기인합니다.
잠시 약 2억 2500만 년 전부터 6500만 년 전까지의 중생대로 가보겠습니다. 이 시기 지구에는 현재의 생명체와 비교할 때 그 거대함과 강력한 힘으로 말미암아 공룡이 절대적 강자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 인간은 웬만한 집채보다 큰 공룡들에 비하면 너무나 약한 존재였습니다. 아마도 생존이 가장 큰 관심사였을 겁니다. 여차하면 공룡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당시의 인간은 생존에 유리한 자극은 받아들이고 불리한 자극은 멀리한다는 생명의 법칙에 따라 본능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통증’ 즉 ‘위험’은 피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그들에게 있어 쾌락은 ‘먹는 것’과 ‘짝짓기’가 거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어떤 위험한 경우에도 ‘먹는 행위’는 생존을 위해 가장 우선시되었으나, 단 하나! 공룡의 출현은 예외였습니다. 공룡이 나타나면 그 즉시 먹는 걸 멈추고 잽싸게 도망쳐야 했습니다. 당장 배를 불리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을 테니까요. 이 말은 ‘쾌락’ 보다 포식자가 주는 ‘위험’이 생존에 더욱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생존의 위험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 조상의 뇌는 자연히 쾌락보다는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이 더 강한 유전자를 물려주었습니다. 뇌 과학적으로 보면, 위험이나 공포를 관장하는 대뇌변연계의 ‘편도체’로부터 위기 신호를 받은 ‘해마’가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갈무리한다는 것입니다. 즉 뇌의 이런 부정적 경향이 분노나 슬픔, 우울, 죄책감, 수치심 등과 같은 다른 부정적 감정들을 부추겨 지나버린 상실과
실패를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합니다. 나아가 현재의 가능성을 폄하하며, 미래의 장애물을 과도하게 확대 해석하곤 합니다. 우리가 종종 자신을 “나는 뭔가 부족해!” 혹은 “나는 뭔가 잘못되었어!”라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 뇌의 진화론적 이유로 우리는 성장하면서 가정에서는 부모에 의해 1:18, 학교에서는 선생님에 의해 1:12의 비율로 부정적인 것에 더 노출되며, 사회에서도 온갖 부정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환경에 놓이게 됩니다. 또한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이가 태어나 5세가 될 때까지 부모에게 최소 4만 번 야단을 맞는다고 합니다. 약 한 달에 666번, 하루에 22번꼴인 셈입니다. 이런 부정적 경험이 우리의 마음속에 계속 쌓이게 되어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깎아내리거나 제한하게 됩니다. 어쩌면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어려서부터 자신에 대해 뭔가 불충분하게 생각하도록 학습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결점이 없는 완전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은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장점만 골라서 가지고 간다거나 단점을 떼어내 버리거나 할 수 없습니다. 빛으로부터 그림자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점이든 단점이든, 그것이 빛이 든 그림자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과 다른 나의 진짜 모습에 못마땅해하며, 때론 그런 나의 모습을 행여 타인이 알아차릴까 불안해하며 말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십수 년 간 각종 심리치료, 명상, 각종 자기 계발 및 치유 세미나 그리고 수백 권의 독서를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은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단언컨대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세상의 모든 자기 계발은 모래 위의 집짓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연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얼마나 인정하고 수용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