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장소에서 느끼는 다른 기분
2021년 여름, 우리 가족은 10년 동안 살던 시카고를 떠났다. 이유는 단순했다. 너무나 추웠다. 따뜻한 날씨를 찾아 남쪽으로, 조용한 교외로 이사했다. 대도시의 활기 대신, 걸어서는 아무곳도 갈 수 없는 일상과 뜨거운 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변화는 내게 큰 깨달음을 줬다. ‘어디에도 완벽한 곳은 없구나....’
도시가 제공하는 많은 것들을 잃고나니 답답함이 밀려왔다. 모든 것이 멀리멀리 떨어져 있어서 할 수있는 일에도 제약이 생겼다.
‘내가 춥다고 난리를 쳐서 이사까지 했는데 이제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때 시작한 게 달리기였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찬 머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남편이나 아이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나 자신을 단단히 세우고 싶었다. 혼자서 이겨내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10K, 하프, 마라톤까지 달리며 1년 반 동안 나는 늘 혼자 뛰었다. 지루함과 힘듦을 견디는 그 시간들이 가슴속 깊이 자신감을 만들어줬다.
‘그래, 뭐든 해보자! 나는 해낼 수 있다!'
이번 시카고 방문은 남편의 출장과 아이들의 가을방학이 맞물린 덕분이다. 2023년 시카고 마라톤 참가와 작년 봄방학 때 다녀온 후, 다시 1년 반 만의 방문이다.
도시에 들어서자, 익숙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다운타운부터 바로 위 북쪽 예전 우리가 살던 동네까지, 외식 후 소화를 시키러 자주 걷던 거리들. 걷기는 참 많이 걸었지만, 그 시절에 달린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땀 흘리는 것도, 추운 날 밖에 나가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곳에서 달리고 있다.
'춥다'는 말과 함께 움츠리며 걷기만 했던 장소들을,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달리며 지나칠 때의 감정은 오묘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한 공간에 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남편과 함께 미시간 호숫가 레이크프론트 트레일로 나섰다. 붉게 떠오르는 해, 상쾌한 공기, 그리고 수많은 러너들. 도시의 아침이 이렇게 생생할 줄은 시카고에 살 때는 몰랐다. 그때의 나는 늘 '춥다!!'며 이불 속에 있었을 테니까.
여행 마지막 날엔 하프 마라톤 레이스에 참가했다. 예전에 살던 집보다 조금 북쪽, 호수 근처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는 21km 코스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호숫가 공원을 달리며 ‘시카고가 이렇게 좋은 곳이었구나’ 싶었다. 약간의 아쉬움과 함께 감사한 마음이 밀려왔다.
여행지마다 레이스에 참가하는 건 나에게 특별한 추억을 남겨준다.
하지만 시카고의 달리기는 그 어떤 곳보다 의미가 깊다. 내가 살았던 곳, 내가 힘들어했던 시간, 아이들이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둘째는 1년 밖에 안 살았지만.)
다음번 방문에는 첫째 아이와 함께 달려보고 싶기도 하고, 언젠가 다시 시카고 마라톤에도 남편과 함께 도전해보고 싶다.
새로운 곳, 멋진 관광지를 달리는 것도 좋지만, 의미 있는 장소를 달리는 일은 그 어떤 여행보다 특별하다.
I love Chic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