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관계 증명서.
기본 증명서.
도장.
신분증.
아이들 것과 내 것을 야무지게 챙겨서 주식 통장을 개설한 게 일년반 전.
은행에서 복잡한 과정(나에겐 복잡)을 거친 후, 결국 주식 계좌는 만들지 않았다.
게으름의 결과였다.
얼른 남편에게 토스했어야 했는데.
결국 지난 일 년 육 개월 간 남편과 나는 '애들 주식 계좌 얼른 터야 하는데'만 반복할 뿐
늘 깜박하기 일쑤였다.
오전 교육이 끝난, 11시 30분.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다.
과연 주식 계좌 개설을 위한 입출금 통장은 살아있는 건지
다시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서류를 준비했다.
왜 이리 보험 약관은 이해하기 어려우며 각종 민원서류는 어색한지.
게다가 은행에서의 업무는 입. 출금. 적금. 예금. 대출 등 다 어렵고 복잡한지
무작정 피하고만 싶은 항목 중 하나이다. 나의 인생에서.
하지만 피할 수 없으니 행동할 뿐이다.
씩씩하게 주민센터로 향하는 길.
가을이 벌써 이만큼 와있다.
노랑주황 가을아, 난 지금 너희를 느낄 수 없어.
왜냐면 난 지금 두려움에 맞서러 가는 길이거든.
서류를 준비하고 은행가는 길, 괜히 푸릇푸릇 잔디와 꽃사진도 찍어본다.
애매한 미국 동네 같은 신도시에 사는지라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갈 수도 있지만
사실 버스로 가면 두 세 정거장, 차로 가면 10분도 안 되는 거리다.
오늘은 운동하는 셈 치고 걸어가 본다.
결전의 장소가 보인다.
동네는 축협은행이라 주식 계좌 개설이 안되고, 옆동네 농협중앙회로 와야만 했다.
젠장, 나의 무식함에 시불시불 욕을 하다가 다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55번.
번호표를 들고 만난 행원분은 뭔가 직급이 있어 보인다.
젠장.
통장은 살아있는데 기본증명서를 잘못 준비했다.
아이들 이름으로 해야 하는데 내 이름으로 곱게 출력해 온 거다.
다시 두 정거장을 걸어서 주민센터로 갔다.
역시나 친절하신 공무원 분이 서류를 잘 준비해 주셨다.
다시 걸어간다.
낙엽이 버석거린다.
미안, 아직 너랑 못 논다.
다시 도착한 은행.
마인트 컨트롤 2차에 들어간다.
그새 번호는 112번.
다시 오느라 수고했다는 의미의 환한 미소의 여자 청원 경찰분이 맞이해 준다.
어색한 웃음을 날리며 자리에 앉았더니, 아까보다 훨씬 친절한 행원분이 설명을 해주신다.
동글동글 안경에 흡사 뉴스 앵커 같은 목소리.
또렷한 눈망울.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을 또박또박해주신다.
비번 설정, 주식 계좌 비번 설정. 그리고 사인하기.
모든 과정을 마친 나는 무사히 은행을 나온다.
뾰족한 수는 없다.
획기전인 묘책도 없다.
두려움에 맞서는 건 말 그대로 두려움 그 자체를 직면하는 것이다.
그냥 부딪히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하기.
긍정의 언어로 무장하고 상상하기.
그것이 나의 두려움을 깨부수는 필살기다.
오늘도 클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