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당원이었던 탈북자가 있다. 친척 중 한 명이 월남하는 바람에 사상을 의심받아 탈북을 했다. 남한에서 삶이 어떠냐고 묻는 질문에 너무 살기가 힘들다, 북한이 살기 좋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거기선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당의 지시대로만 하면 집도 주고, 밥도 주고, 옷도 주고 하는데 남한은 본인이 선택해야 하고 쫄딱 망해도 당사자 책임이니 힘들다고 했다.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선택 노이로제
벌써 그것을 알다니 이분도 남한 사람 다 되었다.
'선택'이란 말을 찾아보니 자연스레 '집중'이란 말이 따라온다.
선택과 집중
많이 들어본 말이다.
검색을 해보니 '고도현'님의 '선택과 집중'이란 노래도 있다.
이 제목의 책도 이미 있고, 하물며 '선택'이란 말이 들어간 책만도 수십 권이다. <몸의 선택>, <선택>, <종의 선택> 제목만 나열해도 너무 많다.
그만큼 선택이란 단어는 우리 삶의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나만해도 그렇다.
당장 브런치에 글을 쓰며, 제목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눈에 띄는 제목, 내 글과 생각이 함축된 제목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서다.
제목을 정하며 글의 첫 문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 두 번째 기로에 선다.
대강의 아우트라인은 있다지만 사실 아직 그 정도로 치밀하진 않아서,
손가락이 널을 뛰며 글을 쓰는 수준이다.
첫 문장을 해결하고 나면 이젠 사진도 문제다.
대단한 일러스트레이터나 된 양 남들이 아름답게 올려준 여러 디자인의 사진이나 그림을 '초이스' 한다.
글을 쓰며 가장 고민되는 순간은 어디까지 나에 대해 오픈하며 쓸 것인가이다.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생각한다.
하지만 일기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글을 쓰는 수준이다 보니 개인의 경험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철저히 글 뒤로 숨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여기서 또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오픈해, 이걸 써 말아, 결국 최대한 적당한 선에서 버무리게 된다.
또 진실이 없는 글은 쓰기 싫어서.
이건 고상하게 포장한 것이고, 꾸며 쓰거나 거짓말을 하면 아무래도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선택을 잘해보겠노라, 무조건 사지만 않으리 결심한다.
밀리의 서재에서 책을 책장에 마구 담아 보며 소비 욕구를 해소한다.
절대적으로 도서관에서 먼저 빌려 읽고, 구입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책만 사시라 결심한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도서관에서 욕심껏 빌렸지만 못 읽고 반납할 책.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사 온 책.
급작스레 예스 24에서 보고 꽂혀서 구입한 책이 다시 책상에 쌓인다.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돌아보면 가장 선택을 잘못했던 건 아이들과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방향을 잘못 잡은 나의 엄마표 영어는 결국 허공에 맴돌았다.
그럴 거면 차라리 기관이나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았어야 했다.
아는 게 병이라 오만을 부리다가 아이들의 황금기를 놓쳤다.
속이 쓰라리고 마음이 허했다.
이 생각을 다스리기까지 2년이 넘게 걸렸다.
학생들과는 척척 굴러가는 영어라는 녀석이 내 아이들과는 터걱거리면서 내 선택을 후회했다.
어떤 날은 갑자기 내가 죄를 짓고 산건 아닌지, 너무나 잘못해서 이렇게 벌을 받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에 꽂히면 집중하며 그것만 보는 동물 같은 습성이, 장점일 때도 있지만 불행일 때도 있다.
나의 선택으로 아이들의 영어를 망쳤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하고 괴로웠다.
직업을 선택할 때도 그때는 맞다고 생각한 일이, 지금은 틀리다고 느껴질 때는 또 씁쓸해진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가 또 고민한다.
그것은 점점 더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이 없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의 선택을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연기처럼 피어오를 때마다 생각해 본다.
왜 그럴까?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싫은 마음.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믿음.
좋지 않은 결과를 보고 싶지 않은 당연함 때문 아니겠는가.
나의 여러 가지 믿음 중에 하나는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다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극히 좋은 일도, 극도로 나쁜 일도 없을 수 있다.
그 안에서 배워가면 되는 거니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늘 잘 이겨낼 수 있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택에 대한 불안은 아직 있지만, 결과를 알고 피해 갈 수 있다고 누군가 속삭여도
별로 미래를 알고 싶진 않다.
선택의 결과도 몰라서 더 흥미롭고, 미래도 알 수 없어서 더 기대된다.
불안한 것 말고 두근두근한 것만 생각해야겠다.
사람에겐 누구나 살아낼 수 있는 비기가 하나씩 있다고 믿는데, 나에겐 '인복'이 그것이다.
늘 나를 좋아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내셔널 지오그래픽> 보도에 따르면 인간이 하루에 150까지 이상의 선택을 한다고 한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백수로 평생 200 살기냐 연봉 8000에 연차 없이 일하기냐, 인스타 스타 or 유튜브 스타냐 같은 밸런스 게임이 유행하는 것도 그만큼 '선택'이란 녀석이 우리 삶에 지대한 비율을 차지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오죽하면 김동식 작가는 <밸런스 게임>이라는 소설을 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