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좋아하는 카레 한솥 끓여놨어. 이따 밥 챙겨 먹어."
동네입구에서 잡화점을 운영하셨던 엄마는 학교를 파하고 들른 나에게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렴풋한 기억 속엔 횡단보도 바로 앞에 엄마 가게가 있었다.
지금이야 홈쇼핑에 라이브 커머스에 해외 직구에 온갖 창구가 존재하지만
당시엔 백화점, 옷가게 아니면 이런 잡화점이 인기 최고였다.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서 놀거나 할 일을 하다가 학원을 다녀왔다.
일곱 살 어린 동생은 할머니댁에서 키우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 동생과 만날 수 있었다.
가게 운영에 늘 바쁜 엄마셨지만 그래도 딸의 음식은 항상 챙겨놓으셨는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노란 카레였다. 일명 카레라이스.
양파를 달달달 볶아 단 맛을 충분히 우려낸다. 거기에 마늘을 첨가하여 다시 달달 볶는다.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넣지 않는 걸 좋아하는 딸을 위해 언제나 감자를 듬뿍 넣어주신다.
어쩌면 나는 카레에 샤워한 감자를 먹고 싶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카레라이스 한 접시를 비우고 나면 늘 감자만 더 떠서 먹곤 했다. 보글보글 끓는 냄비와 코를 찌르는 향긋한 카레 냄새.
학원을 다녀오면 저녁 6시 즈음, 교대 근무를 하셨던 아빠는 아직 퇴근 전이시고 엄마는 가게에서 일이 한창이다. 마침 좋아하는 만화 영화를 할 시간. TV를 켜면 힘센 왕자 '히맨'이 나오는 오프닝 장면이다. 근육질의 힘센 왕자 '히맨'이 악당을 무찌르고, 독수리 여인이 '힘을 내요, 히맨'하고 말하면 여지없이 괴력이 발휘되는 절대 무적 왕자님의 모험 이야기이다.
가스레인지 위 대형 냄비엔 좋아하는 카레가 한가득이다. 딱히 데우지 않아도 따듯한 하얀 쌀밥 위에 끼얹으면 나만의 저녁 식사가 완성된다. 김치는 꺼낼 줄도 모른다.
그냥 카레라이스 한 접시면 만사 오케이다.
TV앞에 밥상을 펴고 앉아 카레라이스 한 입을 앙 먹어본다. 카레 앤 라이스라는 정식 명칭도 모른다. 그냥 나에겐 노란 카레라이스다. 카레처럼 노란 머리 '히맨'왕자를 보며 느긋한 저녁 식사를 혼자 즐긴다. 혼자 있는 집이지만 그렇게 심심하거나 외롭진 않았다.
일 년 후엔 동생과 같이 할머니댁에 살게 되었다.
금요일 오후가 되면 4살 배기 동생의 손을 잡고 할머니댁에서 15분 남짓의 엄마 가게로 향한다.
커다랬던 잡화점은 이제 동네의 작은 옷가게가 되었다.
주중엔 할머니댁에서 학교를 가고 금요일 오후엔 동생을 데리고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가서 주말을 보내고 온다.
엄마 가게에 딸린 작은 방하나.
그곳에서 딸들과 주말을 보내는 엄마의 특별 메뉴는 닭볶음탕이다.
역시나 빨간 닭볶음탕 속의 감자가 맛이 일품이다. 지금은 좋아하지도 않는 닭요리지만 그땐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동생과 방에서 놀고 있으면 엄마는 커다란 솥에서 닭볶음탕을 꺼내 예쁜 접시에 담아주신다. 빨간 양념에 비벼서 먹는 흰 밥이 아직도 기억난다.
감자를 으깨서 밥 위에 살살 비벼본다. 내 취향을 아시는 엄마는 카레 속 감자만큼이나 많은 감자를 닭볶음탕에 넣어주신다.
닭볶음탕인지 감자볶음탕인지 모를 음식이지만 금요일에 먹는 엄마의 음식은 꿀맛이다.
드디어 일요일이 되고 우리 집 여자들끼리 목욕탕에 가는 날이다.
목욕탕을 다녀오면 늘 의식처럼 들르는 경양식 식당.
영화 바베트의 만찬처럼 긴 식사는 아니지만 11살 꼬마에겐 그 어느 곳보다 멋들어진 곳으로 엄마에게 양식기 사용법을 배운 곳도 그곳이다.
따끈한 수프에 후추를 솔솔 뿌리고 맛을 본다.
식전 빵은 적당히 데워져서 쨈을 발라먹기에도 입맛을 돋우기에도 좋다. 냅킨을 살포시 무릎에 깔아본다. 4살 동생과 다른 언니인 나는 목에 냅킨을 끼워 넣지 않는다. 난 11살 10대 소녀이니까.
"자, 왼손엔 포크 오른손엔 나이프를 들고 천천히 썰면 돼. 다 먹었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일자로 놓고, 아직 다 안 먹었으며 90도 각도로 놓으면 된단다."
엄마의 설명대로 우아한 숙녀가 된 것처럼 돈가스를 썰어본다.
물컵도 어른들만 쓰는 와인잔이다.
평소 시간을 많이 함께 하지 못하는 딸들에게 엄마는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하셨다.
이렇게 목욕탕을 다녀와서 우아하게 음식을 먹은 기억. 그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그래서 딸들이 나이 들었을 때나 살면서 힘들 때 이 추억이 생각이 났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땐 그날이 언제 올까 싶었지만 벌써 내 나이가 40이 넘어가고 한 번씩 그때가 생각이 난다.
빨리 출근해서 가게를 오픈해야 하지만 딸을 위해서 아침부터 보글보글 끓였을 카레.
주말에 만나는 딸들을 위해 좁은 부엌에서 열심히 손질하고 만든 닭볶음탕.
고급진 추억 한 스푼 만들어주셨던 '경양식 식당'에서의 기억.
지금은 내가 아이들에게 이 요리들을 만들어주지만 그때 그 맛은 아니다.
카레를 만들면 국물 카레가 되고 닭볶음탕은 여전히 양념 비율이 어렵다.
내 아이들에게 추억의 음식은 무엇일 될까?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요리가 있을까? 학교에 가서 하루종일 애쓸 아이들을 위해 아침 식사는 꼭 준비하는 편이다.
세상 요리 못하는 엄마지만 아이들은 자기 엄마가 최고로 맛있는 요리를 한다며 먹는다.
훗날 내 아이들은 엄마가 만들어준 아침밥이 기억에 떠오를까.
엄마 때문에 속상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기억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엄마의 음식을 생각하며
버티곤 했다.
늘 바빴지만 우리들을 잊은 건 아니라고, 고등학교 때 만성피로에 시달려서 도시락 하나 싸기 힘든
엄마였지만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임을 내가 엄마가 되어서야 깨달았다.
오늘은 내가 엄마한테 음식을 해드려야겠다.
그래서 딸이 속상하게 하면 이 추억 생각하시면서 웃어주시라고, 더 나이가 드셨을 때 딸이 생각나는 그런 음식을 해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