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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돌봄 May 26. 2023

너의 신발은

그래. 그렇게 걸어가자

"같이 가."


시댁 식구들과 다 같이 모여 여행을 갔던 어느 날, 당시 3살이던 큰 아이가 한 말이다.


맨 처음 제대로 사람의 말을 뱉은 날.


물론 아이를 키워본 엄마라면 누구나 알듯이 너와 나의 연결고리가 되는 언어의 표현이란 것은 이미 있었다. 


단지 그것이 말을 배워나가는 아이와 사랑으로 대하는 엄마, 아빠만 아는 말이지만.


참 의아했었다.


뇌의 시냅스가 정교하게 연결되는 시기인 0~24개월.


오감으로 모든 것을 익히고 부모와의 스킨십이 중요한 그때 내가 또 꽂혀있었던 한 가지는  독서를 통해 아이의 뇌 속에 2차선이 아닌 8차선 고속도로를 만들어줄 교육, 그것이었다.


0~6세까지 뇌의 90%가 완성된다는 말에 명품백보다 중요한 게 아이의 시간이라 여겼고, 책을 읽어줬었다.

사실 태교로는 책을 많이 읽어주기보다는 임신부로서 할 수 있는 이벤트나 교육에 많이 참여했었다.

덕분에 물티슈, 기저귀, 육아 상식, 포토스튜디오에서의 사진 이벤트 등 다양한 행사를 가거나 상품을 타오기도 했다.  내 인생의 아킬레스건인 수학이 아이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수학 문제집을 풀어대기도 했다.


큰 아이가 태어나고 산후조리가 끝나니 1차 산후우울증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시댁에서 몸조리를 했었는데 시부모님은 너무나 잘해주셔도 왠지 우울하고 젖소 부인이 된 것 같은 마음에 서러웠었는데 내 집으로 돌아오니 갑자기 힘이 솟았다. 아이랑 이것저것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가 누워있을 때부터 초점책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책들을 읽어주었다. 성경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고전 책을 읽어주기도 했지만 길게 가지는 못했고, 대신 동화책을 많이 읽어주었다. 내 아이가 천재일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있던 시기이기도 했던지라 큰 아이와 책을 읽고 교감하는 시간은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조그마한 몸을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면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듣고 있고, 기어 다니다가도 좋아하는 

보드북을 펼쳐 가만히 앉아있는 동그란 뒤통수를 보고 있으면 마냥 신기하고 귀여웠다. 

엄마가 수다쟁이가 되어줘야 한다던데 말을 잘 못하는 엄마인지라 무작정 책을 읽어주었다.

베드타임 스토리는 기본이고, 한동안 모아두었던 영어 그림책도 꺼내어 읽어주면 아직 말 못 하는 아기인데도 이해하고 통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말도 빨리 할 줄 알았다. 

아들은 원래 말 느리다는 주변 어른들의 말에도 내 아들은 다르다. 아이마다 다른 거지. 딸만 말 빠를쏘냐 하며 귓등으로도 안 들었는데, 25개월이 되어가도록 인간(?)의 말을 안 하는 것은 무엇.


그러다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나오는 말이 '같이 가'  

오 마이 갓.

너무나 신기한 그 순간. 그래! 드디어 너의 방언이 터지는구나.


예쁘다 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을 사용하는 아이.

무작정 싫다가 아닌 불편하다는 말을 쓰고

어딜 가든 읽을거리를 찾아 글을 읽는 아이.

어린이집에서도 "우리 OO 이는 다른 친구들과 쓰는 언어가 달라요."라는 말을 들으며

은근히 만족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집에 가기 위해 신발을 신으려던 그때였다.


"시.. 발.. 엄마 시.. 발"


응?

왓?

왓 디 쥬 세이?


재스민 공주도 놀란 단어


내 귀를 의심했다.

동공이 흔들리며 이것이 현실인가, 도대체 누구에게 들은 것인가 내 전두엽을 돌려봤다.

이런 말 할 사람이 주변에 없는데.

매운 고추를 씹은 것처럼 진땀이 났다.

팔자 주름에선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설마 남편이?

무심코?


"OO아, 방금 뭐라고 했는지 엄마한테 다시 말해줄 수 있나요? 잘 못 들었는데."
"시발, 내 거 시발 주세요"



순간 내 눈에 띈 건 아이의 작은 신발.

그래, 그랬구나.

역시 엄마의 귀가 썩은 거였어.

순수한 아이의 말에 남편부터 소환해서 도대체 누가 이런 말을 퍼트린 것이냐 셜록 홈스에 빙의했지만

아이의 '신발'이라는 말을 그렇게 들은 것이다.


혼자 신발을 신어보려고 했던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 한편을 쓸어내렸다.

스스로 신발을 다 신고 척하고 일어나는 아이를 보니 혼자만의 원맨쇼(원우먼쇼?)에 웃음이 났다.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는 얼굴에 엄지 척을 해주었다.


사람은 가끔 아니 자주 그럴 때가 있다.

같은 말도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같은 표현도 내 맘대로 내 기분에 따라 해석한다.

그 작은 간극이 서로 간의 오해를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 사람이 지금 어디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음도 알게 된다.


아이의 말 한마디에 놀람과 안도를 동시에 경험한 것처럼

우리 인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둘 중 하나를 고르고 '그래, 결심했어'를 말하는 것이 아닌

내 생각에 따라 어떤 상황이든 달라질 수 있는 마법, 그런 게 있다.


이제 엄마보다 더 큰 사이즈의 신발을 신는 아들을 보며 이 한 가지는 말해주고 싶다.

앞으로의 삶에서 무수한 상황을 접할 거고

많은 경험을 할 것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거라고.


하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세상을 좀 더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것을 말이다.

엄마라는 홈그라운드 안에 있을 때 무한한 사랑을 받아본 경험으로

좀 더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세상의 좋은 점을 항상 찾아보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아직은 함께 가는 걸음 속에서 

마음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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