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에 맞는 신발을 신으면 신지 않은 것처럼, 신을 때마다 걸을 때마다 편하고 기분이 좋다. 처음에도 기분 좋았던 신발은 계속 신을수록 길이 나서 나의 발에 더할 나위 없는 맞춤형 신발이 된다. 그러다 보면 매일 같은 신발에 저절로 발이 가서 그 신발만 닳게 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지만 한 철에 한 켤레 나에게 꼭 맞는 신발을 신다 보면 출근길도 외출길도 가벼워진다.
최근에 매일매일 신는 신발이 하나 있다. 새벽예배에 갈 때도, 출근을 할 때도, 마트나 도서관에 갈 때도, 아이들 학원 픽 드롭을 하러 라이드를 갈 때도 한 켤레만 주구장창 신는다. 검은색 소가죽으로 만들어진 슬립온 형태의 로퍼인데 덥지도 춥지도 않은 요즘 발을 쓱 밀어 넣어 신게 되는 신발이다. 같은 디자인, 같은 소재의 흰색 로퍼도 있는데 때가 탈 염려 때문인지 휘뚜루마뚜루 잘 신게 되는 신발은 역시 검은색이라서 발이 계속 가고 있다. 불편함 1도 없이 내 발에 잘 늘어나 편하게 휙 휙 신어지는 신발은 출근길이 늦어 약간의 가속페달을 밟을 때도, 잰걸음으로 걸음을 재촉할 때도 어김없이 발에 착 붙어서 기분 좋게 동행하여 준다.
검은색보다는 잘 신지 않게 되는 흰색 로퍼. 위의 판매용 사진보다는 훨씬 사용감이 많다. 그래도 편한 건 마찬가지
신발을 생각하다 사람과의 관계도 생각해 봤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낯설어 서로에게 맞추어 가고 길들이기를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만의 길이 나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자연스럽고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은 관계가 된다. 나의 발에 잘 맞추어 길들여진 신발처럼, 내 마음과 나다움을 잘 발현해도 부끄럽거나 이상하지 않은 편안하고 기분 좋은 관계가 된다. 좋아하는 신발을 더 오래 신으려면 잘 닦아 관리를 하며 신어야 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관계가 계속 지속되려면 그 또한 관리가 필요하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나다움과 너다움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관계가 되도록 관리하고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나에게 꼭 맞아 편하게 길들여진 관계는 몇이나 될까 생각하며 유안진 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글이 생각났다. 이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나에게는 허물없고 편안한 관계가 얼마나 될까, 그런 사람이 나에게는 누굴까 하고 생각하며 글을 읽게 되는데 글을 다 읽고 난 종국에 생각나는 사람이 없거나 딱 마음에 차는 관계가 없으면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한 살, 두 살 더 들어가면서 그래도 철이 나는 건지 이제는 그런 존재가 될 만한 이가 없으면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존재가 되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 말해도, 덜 말해도 어색하거나 주책이라 여겨지지 않는 관계와 사람. 퍼주어도 아깝지 않고 본전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기가 힘들고 나만 그런 사람이 되려면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 (전문용어로 호구가 된다고들 하더라.) 그런 관계를 만나기도 만들기도 지속하기도 힘이 드는데 그럼에도 내가 좋은 사람이 먼저 되어 보자고 마음을 먹어 본다.
어디선가 들은 건지, 읽은 건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수박과 같은 사람 말고 토마토 같은 사람을 만나라 라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수박처럼 겉과 속이 다른 사람보다 토마토처럼 익은 정도가 그대로 드러나 속을 알만한 사람으로,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이가 먼저 내가 되어 보고 싶다는 높은 바람도 가져 본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면 그런 나를 알아보고 나와 같은 토마토를 꿈꾸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지 하는 희망과 더불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