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다가, 나를 의심하게 됐다
나는 내가 기준이 꽤 명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적어도 웃음에 관해서는 그랬다.
“예능은 예능으로 봐야지.”
“불편한 사람들 때문에 다 망친다.”
이런 말들에도 꽤 공감해왔다.
웃기자고 하는 말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의도를 캐묻고,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모든 걸 문제 삼는 분위기가
오히려 웃음을 더 숨 막히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해외 스탠드업 코미디를 볼 때도 그랬다.
인종 이야기, 나라별 비하, 외모나 정체성을 건드리는 농담까지.
나는 대부분 유쾌하게 넘겼다.
“아, 이건 한국에선 힘들겠네.”
“프로불편러들 때문에 못 하겠지.”
어쩌면 약간의 사대주의도 있었던 것 같다.
해외는 깨어 있고, 우리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식의 생각.
한국 개그맨이 해외 무대에서 스탠드업을 하는 영상을 보며
“역시 저런 건 해외라 가능한 거지”라고 말했던 기억도 있다.
그러다 알고리즘이 나를 다른 방향으로 데려갔다.
한국의 스탠드업 코미디 영상들이 하나둘씩 뜨기 시작했다.
처음엔 꽤 반가웠다.
“와, 우리나라도 이런 게 가능하구나.”
“생각보다 유쾌한데?”
“그치, 한국인들 이런 거 잘하잖아.”
어떤 영상은 정말 재밌었다.
아마 ‘대니초’라는 코미디언의 스탠드업이었던 것 같다.
한국 사회의 특유의 맥락을 건드리면서도,
너무 날 서지 않고,
웃음이 먼저 나오는 그런 공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역시 나는 기준이 명확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리즘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비슷한 한국 스탠드업 코미디들이 계속 이어서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뭔가… 뭔가 불편했다.
이유를 딱 잘라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반복되는 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관객 중 한 사람을 집요하게 찝고,
그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외모나 말투, 반응을 계속 끌고 가며 웃음을 만드는 방식.
웃긴데, 웃기기만 하지는 않았다.
나는 웃으면서도 동시에
‘이건 좀 선을 넘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기준에서, 이건 선을 넘는 농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해외 스탠드업 코미디에서도
관객 하나를 집어서 무안 주고, 돌리고, 몰아붙이는 공연을
나는 분명 재미있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땐 위트 있다고 느꼈고,
재치 있다고 생각했고,
용하다고까지 말했었다.
그렇다면 뭐지?
내가 느끼는 이 ‘선을 넘었다’는 감각은 어디서 온 걸까.
내가 세워온 기준은 정말 일관된 기준이었을까.
아니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감각이었을까.
혹시 내가 불편해진 건
그 농담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내가 대치될 수도 있다는 상상 때문은 아니었을까.
만약 내가 그 관객이었다면?
사람들 앞에서 저렇게 집요하게 소비되는 대상이
‘나’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웃음이 갑자기 멀어졌던 건 아닐까.
그제야 조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명확하다고 믿어왔던 기준이
생각보다 많이 상황적이라는 사실.
나는 기준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기준을 가진 것처럼 느끼고 싶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아직 답을 못 찾았다.
어디까지가 괜찮은 농담이고,
어디부터가 선을 넘는 건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내가 불편함을 느꼈던 그 순간은
스탠드업 코미디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의심의 시작이었다는 것.
어쩌면 우리는 예민해진 게 아니라,
당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웃음의 기준은 훨씬 더 복잡해진다.
나는 아직 그 선을 못 찾았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웃다가 멈춘다.
그 멈춤이 위축인지, 성숙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내가 믿어왔던 ‘명확한 기준’이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게 된 지금이,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래서 더 솔직한 상태라는 것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