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청년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삶의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한다."였다. 자격증 취득, 스펙 쌓기, 전공 공부, 연애, 우정, 여행 등.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청년이니 만큼, 지금 당장의 즐거움보다 거시적이고도 긴 안목으로 삶을 준비해야한다는 조언이었으리라. 물론, 상담을 공부하는 나에겐 스펙 쌓기나 자격증 취득이 그리 큰 상관이 없었다 할지라도 어떤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야하는지 늘 고민이었다.
이 고민은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 안정적일거라고 생각하는(?)' 중년이 되었을 땐, 하지 않게 될 고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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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보면 청년만이 아니라 중년에도 여전히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에 허우적 댄다. 오히려 청년의 때와 달리 결혼, 가정, 자녀 등 저마다 다양하고도 굵직한 블럭들이 더 생겨났으니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란 참으로 어렵다. 한낱 하루를 살아감에 있어도 테트리스를 적절히 끼어맞추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같아선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 채, 삐삐삐~ 소리를 내며 무섭게 테트리스가 쌓여 게임이 오버되는 상황같다. 테트리스는 도대체 어떻게 잘해야하는 것인가?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인생이 여유로워지리라 생각했다. 내가 해야할 공부는 이제 끝이라며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개뿔. 인생사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것 아니던가. 보따리 장수의 시작. 풀타임 직업에 여기저기 대학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관리자의 눈치를 봐가며 학교 일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열심히 또 내어 달렸다. 보따리 장사가 지치기만 하면 쉽게 포기할 수 있을 터인데.. 세상에! 너무 재밌다. 아이들과 상담만 하다가 현장의 경험이 살아난 강의를 할 때, 마치 내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이론과 경험의 조화, 과학자-실무자의 조화. 비루한 경지에 서서 감탄하였다. 맙소사! 일은 더 늘어났다.
허기진 사람처럼 무언가가 더 하고 싶어진다. 이미 많은 걸 하면서도 틈이 나면 무언가로 채우고 싶다. 상담분야는 실무가 중요시 되기에 하고 싶은 집단상담 프로그램, 교육, 강의, 수퍼비전 등등. 너무 많은데 학교에 있으니 전부 다 벌릴 수 없는 현실이라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이것뿐이랴. 참으로 잡다한 사람이라 상담, 강의 외에 독서, 글쓰기도 파고들어 제대로 하고싶다.
세상 또한 날 가만두진 않는다. 바쁜 SNS 속 사람들을 보면 일을 또 벌리고 싶다. 50대 후반, 선배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이라도 젊고 건강한 지금의 중년에 노젓고 싶다. 채찍질 아닌 채찍질을 스스로 하고 있는건 아닐까? 여전히 청년의 때를 못 벗어난 마음 한켠엔, 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도사리는 걸까?
이렇게 생각이 생각을 좇아 달리다보면, 그 끝엔 우리 아이들이 보인다. 강의가 끝나 여유로운 요즘, 시간을 내어 첫째와는 요가운동, 둘째와는 자전거타기와 필라테스 등을 하지만 부족한 건 아닐까 걱정한다. 물리적으로 충분하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함께 하려고 하지만, 어느새 나만큼 커버린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툴툴거린다.
.... 중년인 지금, 내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주어진 시간안에서 내가 가장 우선순위로 여겨야 할 일들은 무엇일까? 여전히 고민스럽다. 그래서 요즘 새벽마다 우선순위를 두고 간절히 기도한다. 어떤 일이든 마음씀씀이와 대가는 따르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우선순위로 여기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형국이 달라질 것이다. 명성이나 인정 따위를 얻을만큼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니 무언가 더 내어달리는 건 좀 .. 아닌 듯하다. 그저, 주어진 일들에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오은영이 되기 위해, 올인하기보다 아이들, 내게 주어진 일들을 적절히 배분하며 마음을 써내려가고 싶다. 애플의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가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평생에 내가 벌어들인 재산은 가져갈 도리가 없고,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사랑으로 점철된 추억뿐이라고. 물질은 잃어버리더라도 되찾을 수 있지만, 절대 되찾을 수 없는 게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삶’이라고. 가족을 위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을 귀히 여기라고.
주어진 일에 대한 감사와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는 내가 되고 싶다.
적절한 선에서 적절히 타협하며, 무리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할 수 없는 것들은 즐거이 단념할 수 있는 내가 되고 싶다. 미래의 일과 닥친 일들에 허덕이는 삶이 아니라, 여름철 꿉꿉한 바닥을 온 발바닥으로 느끼며 현재를 살아가고 싶다. 먹다 남은 반찬을 넣어 쓱쓱 비벼, 친구와 가족들과 비벼 먹는데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삶을 살고 싶다.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빨간머리 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