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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드온 Dec 28. 2018

기억나지 않을 뿐 경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심리극 디렉터의 시선으로

나는 왜 질문을 시작했을까?

내가 심리학을 선택했을 때 가장 머리에서 맴돌았던 단어는 '포기'였다. 부모의 반대에 서서 무언가를 항상 보여주어야 했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는 '포기'보다 '막막함'이 우선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서지 않았다. 대학 복학했을 때 2학년 시절에는 학부 수업보다 학회에서 진행하는 워크숍에 참여하기 위해 아르바이트 비용을 쏟아부었다. 나는 차를 타고 전국을 다녔다.  한국 심리학회 산하에 있는 발달, 성격, 범죄 등. 워크숍을 다니며 끝날 때마다 강사들에게 항상 질문했던 것이 있었다.


당신은 소진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하는가?

그 질문을 받은 강사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또는 너무 일상적인 이야기로 질문에 답했다. 나는 여전히 '소진'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2018년도에 우연히 유튜브를 시작했다. 문득 떠오르는 질문은 "일상에서 자신을 어떻게 돌보는가?"였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소진과 돌봄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소진은 말 그대로 힘을 다 써버린 상태다. (이 글에서는 개념적인 이야기는 제외) 쉽게 말해 더 이상 쓸 힘이 없는 모습이다.

우리가 일상을 살다가 힘이 없을 때 어떻게 할까? 산을 오르다 더 이상 힘이 없어 오르지 못할 때 그저 멈추어서 쉰다. 바위 위나 나무에 기대어 잠시 머문다. 초코바를 먹거나 물을 마시면서 숨을 돌린다. 어떤 이는 쉬고 나서 다시 산을 오르거나,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도 한다.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어도 일상에서 우리는 지칠 때 이처럼 자신에게 돌봄을 주었다.


우리는 소진이 되었을 때 돌봄으로 자신에게 다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 돌봄은 의존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처음으로 의존했던 경험은 어디에 있을까? 엄마와의 관계로 볼 수 있다. 사람은 탄생을 시작으로 의존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절대적인 의존 시기를 지나야만 '나'를 만나게 된다. (많은 심리학 이론에서 이미 개념적인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는 이야기지만 나는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겠다.)

나를 만나기 위해서 절대적인 의존 시기를 지나야 한다는 건 매우 의도적이고 우연한 경험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본다. 환경과 유전이 모여져 있는 절대적 의존 시기에서 엄마와의 관계와 이미 유전적으로 결정된 생물학적 기저가 '나에게' 전달된다. 나와 타인, 세상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건 절대적인 의존 시기에 충분히 좋은 대상에게 일관성 있는 좋은 경험을 했다는 의미로 본다. 아기들이 태어나 신처럼 절대적 존재에게 요구한다. 울음으로 몸부림으로 배고픔, 통증, 외로움을 표현한다. 이는 소진이고 비어져 있는 상태로 이해했을 때 최초의 돌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신이 경험한 최초의 돌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기억이 안 난다고. 그렇다. 아직 뇌가 기억할 수 있는 생물학적 발달을 하지 않았던 시기의 기억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경험은 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을 뿐 경험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엄마에게 심리적인 독립이 시작되는 사춘기 무렵에는 '자기'로 돌아오는 문이 열린다. 그 길은 누구나 초행길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이미 엄마와의 관계에서 익숙한 방법으로 길을 걸어간다. 마음의 독립은 하얀색 도화지에 두 손에 들려진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 시작점에 또래 친구, 선생님 등 사람과 우연한 사건들이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소진될 때 자기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돌봄의 시작점이다. 자기로 돌아가는 길에는 많은 유혹이 있다. 마치 욕구를 충족시켜줄 것 같이 생긴 것들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텅 비어있는 상자와 같다. 자기의 돌봄이라 생각했던 것은 욕구 충족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자기 돌봄은 욕구 충족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로 돌아올 수 있는 순간들은 이미 일상에 있다. 몸에서 보내는 여러 느낌들이 그것이다. 오감이라 말하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다. 배고픔도 그중 하나이다. 잠을 자는 것, 즐거움을 찾는 행위도 같다. 우리는 얼마나 나로 돌아올 수 있을까? 행위의 역할인 남자, 아들, 남편, 아빠가 아니라 '나'로 돌아올 수 있는 순간. 그 중심에 자기 돌봄의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서는 24시간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오프라인은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유한성을 가지지만, 이제는 온라인으로 접속만 하면 타인과 세상을 만나게 된다. 온전히 나로 돌아가는 길은 보지 못하고 소진된 상태로 접속만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없다."


나는 유튜브에 '일상에서 자기를 돌보는 법'을 인터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거절, 또 거절이다. 몇몇의 사람들이 말한 내용 일부에는 무엇인가 주의를 기울인다. 취미생활,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인다. 조금 다른 차원으로 해석하면 접촉으로 이해되었다. 접촉은 그 기원은 다시 의존이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 중에 소진과 돌봄이 필요하다면 기억나지 않지만 경험했던 그 의존의 기원으로 되돌아가서 물어야 한다. 그때 정말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좌절로 인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심리학의 많은 이론들이 과거에 초점이 있다. 과거에 경험을 묻는 것에 비판적인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거를 묻는다는 건, 과거가 현재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현재의 모습을 다르게 만들고 싶다면 과거에 결핍된 면을 이해하고 현재를 다르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청소년들을 만나면 꿈,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미래는 결국 현재의 재현이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살아가면 원하는 미래를 위해 지금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소진, 돌봄, 꿈은 지금 여기에서 누군가의 만남으로 이어져 있고 생각한다. 그 만남은 외부에 있기보다 내부에서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참 어려운 시작이다. 기억나지도 않지만 몸에서 말하는 경험은 아직도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불편하다고 눈을 감고 길을 걷지 말아야 한다. 과감히 눈을 뜨고 오늘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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